추상미술의 시조 칸딘스키.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 태생인 바실리 칸딘스키. 그는 20세기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예술의 탐험가였다.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는 구상미술이 세계미술의 큰 산맥을 이루었던 시대에 칸딘스키는 과감하게도 내면의 심상을 중시한'추상미술'이라는 새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듯 칸딘스키의 추상미술도 작은 사건에서 비롯됐다. 독일 뮌헨에서 활동하던 1910년의 어느날. 작업실에 들어서던 칸딘스키는 벽면에 비스듬히 세워진 한 작품에 매료당했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속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형태와 색채로구성된 아름다운 그림. '누가 이런 명작을 갖다 놓은 것일까?' 칸딘스키는 그 매력적인 그림이 바로 자신의 작품이란 걸 알게됐다. 캔버스가 잘못 놓여져 원래의 형태가 달리 보인 때문이었다.평소 순수한 형태와 색채만을 사용해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칸딘스키는 자신이 지향하는 예술세계가 구상의 세계와 맞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됐다.
바로 그해, 엄격한 지적 성찰과 고뇌끝에 구상회화의 틀을 탈피한 추상수채화를 첫선 보였을때주위의 반응은 냉담했다. 뭐가뭔지 알아볼 수 없는 형태와 색의 덩어리, 낙서같은 선들은 리얼리즘미술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그림이 아니었다. 시대의 첨단을 걷는다는 아방가르드 화가들조차배척했다.
무모한 도박인가? 내면세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혁명적인 사조인가?
칸딘스키와 그의 몇몇 추종자들은'치유될 수 없는 미치광이'라느니'경솔한 협잡꾼, 허풍선이'등으로 맹렬히 비난당했다. 칸딘스키가 회장인 신예술가연합의 회원인 오토 피셔마저 '주제가 없는작품은 용납될 수 없다'며 반기를 들었다. 칸딘스키는 결국 자신이 만들었던 신예술가연합을 탈퇴, 소수의 동조자들과 함께 이른바 '청기사'라는 모임을 조직,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에 매달렸다.칸딘스키는 추상미술의 3가지 요건으로 창작가의 개성, 내면적 가치, 순수성 등 정신적인 면을 강조했다. 미술은 인간영혼을 승화시키고 정제시켜야 하며, 따라서 화가의 임무는 무거운 십자가를진 것과 같다고 역설했다. 일부 언론들은 '인간정신의 심연에 근거한 예술과 비교할때 살롱전에지겹도록 등장하는 풍경화나 정물화·나체화보다 더 단조로운 것이 있을까'라며 추상미술에 호감을 나타냈다.
칸딘스키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 한때 미술관련 공무원이 되기도 했지만 1922년다시 러시아를 떠나야만 했다. 공산주의 선동을 위해 사실주의를 선택한 조국은 칸딘스키가 더이상 예술창작을 할 곳이 아니었다.
독일에 귀화, 세계화단에서 인정받고 있던 칸딘스키는 독재자 히틀러가 현대미술가들을 정신이상자로 몰아붙이면서 요주의 인물로 지목돼 나치에 의해 추방됐다. 1933년 프랑스로 이주, 귀화한그는 미술의 도시 파리에서 독창적인 추상미술의 세계를 심화시켰다.
센강과 블로뉴숲을 사랑했던 거장 칸딘스키. 큰 키에 가느다란 테의 안경,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78세때인 1944년 12월, 제2의 조국 프랑스에서 눈을 감았다.
칸딘스키에 의해 창시된 추상미술은 미술을 구상과 추상의 두 산맥으로 나누는데 결정적 역할을했다. 추상미술은 지적이고 기하학적인 추상과 서정적 추상의 두가지 큰줄기로 발전, 21세기를 향하는 지금까지도 세계미술의 중요한 흐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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