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37)-여류명창 김초향

입력 1998-10-09 14:02:00

대구 태생의 여류명창 김초향(金楚香.1900~1983)은 여창(女唱)으로는 드물게 '적벽가'(赤壁歌)에서일가를 이루며 창극계를 주름잡은 여인이었다.

'이화중선이냐, 김초향이냐'고 할 정도의 당대 최고 명창 이화중선과 소리쌍벽을 이루던 명창 김초향은 의연 유장한 소리품격으로 당대의 명사.귀명창들을 매료시켰으나 일찌기 집안에 들어앉는바람에 큰소리꾼으로서 족적을 길게 남기지는 못했다.

이화중선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소리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 공인된 그의 위치와 기량은 남부럽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소리를 좋아한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의 별장을 드나들며 소리를 했으며, 김성수.송진우.조봉암.장택상.염상섭 등 당대의 정객 사업가 예술가 들이그의 소리를 깊이 사랑했다.

박황은 그의 '판소리 2백년사'(사사연 펴냄)에서 "일구 일절에 너무 편벽의 힘을 쏟으므로 전체를통괄하는데 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너무 인위적으로 흘러서 부자연스런 점이 적지 않은 것도 그녀의 결점이었다"라고 평하고 있으나 오히려 이같은 것은 여류 명창 가운데 독특한 그만의 개성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전력을 다하는 치열함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둔탁하지 않고기름을 바른 것처럼 유연하고 품위가 있는 소리맛을 지녔던 김초향은 판소리 5명창(송만갑.김창환.이동백.정정렬.김창룡)으로부터 소리바디를 물려받았다.

판소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기획 발매한 신나라레코드의 'SP시대의 판소리 여류 명창들1'편(사진 참조)에 수록된 김초향의 '어화 청춘 소년들아' '적성의 아침날' '홍보 집터 정하고 집짓는데' '삼고초려'등 소리를 보면 역시 전력을 다하는 치열한 창법이 돋보인다.대구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맏딸로 태어나 13세때 모친을 잃고, 14세에 아버지와 동생들을 부양하겠다는 효심으로 서울 무대에 선 김초향은 소리.춤.줄타기등 온갖 재주를 부리던 순회공연단체 협률사에 몸담으면서 소리에 투신했다. 서울에서 몇년의 소리 수련을 쌓은 뒤 대구에서 명창대회가열리자 김초향은 경남 김해 출신의 명창 김녹주와 마지막 경쟁을 하게 되었다.홍보가에 능한 김초향과 춘향가에 장한 김녹주의 창은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백중이었다. 아무튼 고향에서 가진 대구명창대회 바람에 김초향의 이름은 약관에도 다다르기 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불운으로 강해진 성격에 소리욕심이 많았던 김초향은 '이화중선이냐 김초향이냐' 혹은 '김초향이냐 김녹주냐' 할만큼 여류창극계의 일인자가 되었을때 조차 소리공부를 쉬지 않을 정도로 판소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균청 김창환에게 토막소리를 배운 후 정정열에게 춘향가와 적벽가를, 송만갑에게 홍보가를 배웠으며, 이동백에게서 소리바디를 전수받기도 했다. 송만갑의 수제자였던 김정문에게서 춘향가 홍보가 적벽가의 토막소리를 배웠다.

김정문은 남자명창들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적벽가를 여자인 김초향에게 가르쳐주면서 "능히 적벽가를 배워도 아깝지 않은 목청"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김초향은 30년대 초반에 박녹주 오태석 임방울 등 명창들과 일본 오사카에서 음반 취입을하고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충남 공주의 김동주(전 경제기획원 김준성 부총리의 큰아버지. 나중에 김부총리가 이댁의 양자가 됨)의 후처로 들어앉는 바람에 소리판 일선에서 일찍 퇴장, 이화중선 박녹주 등이 오랫동안 명창으로 많은 사람들 기억속에 남아있고 음반도 풍부하게 남긴 것과는 대조적으로 잊혀진 소리꾼 즉 평범한 아낙네의 길을 걸었다.

대구 성광고 음악교사 손태룡씨는 "일제 치하 조선일보 동아일보 음악 기사 색인을 조사한 자료를 보면 전성기 시절 김초향은 수재를 당한 삼남지방민을 위한 모금공연을 대구에서 펼쳤고, 나라를 잃고 해외에서 헤매는 만주동포들을 위한 기금 마련에도 앞장서는 등 민족의식도 남달랐다"고 말했다.

김초향의 양아들 김준성 부총리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김초향의 기제사를 올리고 있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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