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 대구경제 고부가로 살리자-자생적 실리콘 밸리

입력 1998-10-09 14:33:00

서울 송파구에 있는 이동통신 장비제작업체 '윌텍'의 장부관사장(36)의 마음은 늘 고향인 대구에와있다. 영남대 전자공학과, 삼성전자를 거쳐 지난 96년 창업한 후 올해 매출 1백여억원.그는 성공궤도에 오르자 곧바로 자회사 '윌서치'를 설립, 지난4월 영남대 창업지원센터에 입주시켰다. 정보통신 업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경우다. 장사장은 "대구.경북지역 여건이 좋지않아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을 뿐 고향에 자리잡고 싶어하는 기업인이 주위에도 여럿 있다"고 말했다.

70년대 후반이후 지역대학에서 배출한 전자.정보통신 관련 인력은 무려 1만3천여명. 지금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의 차장, 과장급 전문인력으로 뿌리내렸다. 이 가운데 자기기술로 벤처기업인의대열에 뛰어든 사람만 벌써 2백여명. 나머지도 기회만 주어지면 창업의 길로 나서겠다는 사람이상당수다. 심지어 일본에서 성공한 지역출신 기업인들도 고향행을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옮겨올 수 있는 그런 '고향'은 아직 없다. 수도권에만 정보통신산업의 80%이상이 몰려있는데다 지방의 기술, 자금, 물류 등의 인프라가 너무나취약한 탓이다.

정보통신.전자산업은 IMF에 아랑곳없이 2002년까지 연평균 15%이상의 안정적 성장이 예상되는이른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때문에 인천, 대전, 춘천 등 지방도시들은 이들 기업을 유치할 수있는 기반시설 마련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에 비하면 대구는 '뒷짐'이다. 지방정부도, 경제계도 '대규모 첨단산업단지 조성'이라는 공허한구호만 외쳐댄다. 벤처빌딩 건설이나 소프트웨어진흥구역 설정 등 보다 현실적인 방안도 언제쯤구체화될지 모른다.

서울에 있는 지역출신 정보통신업계 대표들은 지난해말 자발적으로 지역기관들과 함께 경북대구정보통신협의회를 구성하기도 했지만 정작 지역의 호응이 없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대학이나 중소기업청 등의 창업지원은 그나마 성과가 기대되지만 어느정도 성장하면 오히려 지역을 떠나야할지 모를 상황이다. 지난해 창업한 모 소프트웨어업체 사장은 "지역시장이 워낙 좁아성공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갈 수밖에 없다"며 "현재의 지원구조로는 역외기업 유치는커녕 지역기업 이탈도 막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반시설의 기본은 입지조건이다. 전자.정보통신은 고부가가치 업종인만큼 대규모 단지 조성은 의미가 없다. 환경친화적이어서 오염방지시설 등 부대시설도 필요치 않다.

지역 벤처기업 도원텔레콤 이철호사장(40)은 "우선 아파트형 공장 하나라도 제대로 지어 좋은 조건으로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 지방정부 차원에서 가능한 입지지원과 약간의 세제혜택, 병역특례나 인턴제를 이용한 인력공급 등 몇가지 조건만 갖춰지면 서울에 있는 기업 10개 이상은 쉽게 유치할 수 있다는 것. 이 가운데 2, 3개만 성공하면 업체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정보통신 산업단지가 형성된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은 정보수집과 부품구매, 마케팅, 자금조달 등이다. 기계에서 정보통신으로업종전환을 계획중인 한 지역기업 관계자는 "정보부족과 판로개척 등에서 심각한 한계를 느낀다"고 털어놨다.

이 문제 역시 기업유치 이후 공동화작업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 경북대 이상룡교수는 "지방정부와 기업들이 비영리법인을 설립, 관계전문가들을 모으면 판로나 부품 공동구매 등은 어려울게 없다"며 "대구-구미-포항을 하나의 축으로 연결할 수 있다면 기술협력과 정보교류 등이 더욱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의 정보통신관련 시장규모 역시 적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수요자인 지역기관이나업체들이 무조건 대기업을 선호하는게 문제. 윌텍 장사장은 "시장형성은 서울업체 유치의 최대관건 가운데 하나"라며 "기술력에 차이가 없다면 지역업체에 일을 맡기려는 자세가 절실하다"고지적했다.

대구지역에 기반이 거의 없는 첨단산업 유치를 위해 필요한 조건은 이밖에도 여러가지다. 그러나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첨단산업 유치가 긴요하다는 지역민 전체의 인식과 발상의 전환, 공동의노력이다.

철강산업의 발상지 미국 피츠버그시는 80년대 초반 철강산업이 쇠퇴하면서 일자리와 인구가 감소, 폐허화될 위기까지 몰렸다가 지금은 미국 최고수준의 첨단.서비스산업 도시로 변모했다. 시정부와 산업자본가, 시민들이 협력해 첨단기업 유치를 위한 기금모금, 각종 이벤트 행사와 함께 마케팅 조직설치, 벤처캐피탈 설립 등 도시재건 프로그램에 공동노력한 결과다.

영국 북아일랜드 지역은 지난94년 공식적인 내전종식 이후 부지 및 도로, 하수처리 등 각종 인프라와 인력 등을 파격적으로 지원해 1백80개 외국기업, 24억달러 규모의 직접투자를 유치해냈다.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와 지역민들의 공동노력이 밑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첨단산업 유치에 사활을 건 국내 지방도시간 경쟁은 아직 출발선상에 놓여있다. 지금이라도 대구시와 지역경제계가 적극 나선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기반만 조성된다면 대구에도 실리콘밸리가들어설 수 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