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는 요즘에도 인구에 회자되는 한국의 명시 가운데 하나이다. 일제치히 민족의 대표적 저항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육사를 빼어난 서정시인으로 평가받게 한 작품이다.
당시에 드물었던 포도원
그러나 청포도가 어떻게 쓰여졌는지 그 시작 과정이나 혹은 배경에 대한 천착은 드물었다. 이육사가 바다와는 동떨어진 경북의 북부 내륙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성장했으며 더구나 당시에는 포도원이 매우 드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런 시상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평자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문학작품은 반드시 그 작자의 현실적 체험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체험 자체가 결코 문학작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체험에 근거하지 않고 작품 구상이 완성된 예는 거의 드물다. 하물며 바다와 포도원을 한번도 찾아가 보지 않고 어떻게 청포도의 시상이 떠오를 수가 있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 나온 것은 1970년대 말이었다. 당시 포항에서 창작활동을 하던 한흑구 선생과 몇 분이 어느 날 우연히 송도해수욕장에 모인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한담 끝에 코주부사를 경영하던 심당 김대정 선생이 무심코 일제시대 경주 남산의 암자에서 은둔하던 이육사 선생이 포항을 찾아와 자신이 오천 포도원으로 안내한 적이 있노라고 했다. 지금은해병사단이 주둔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그곳이 유명한 포도원이었던 것이다.
포항서 얻은 청포도 詩想
이육사 시인이 청포도의 시상을 얻은 것은 그 때였다. 옆에 동석한 또 한분이 자기도 동참했노라고 부연하였다. 청포도의 신비가 풀린 것은 그자리에서였다. 그 말을 들은 한흑구 선생은 그뒤 시문학지에 이육사의 청포도에 관한 문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짧은 수필을 발표하였다. 필자도 동아일보를 비롯한 몇군데에 그 사실을 언급하였는 바 지금은 그 것이 정설화되고 있다.아닌게 아니라 현재 해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월지 부근에 올라가 영일만을 바라보면 비록 이육사와 같은 천성적 시인이 아니더라도 '하늘밑 푸른 바다가 슴을 열고/흰돛단배가 곱게 밀려서오는'시상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나중에 밝혀진 이육사의 연보에 의하면 이육사가 청포도를 발표한 것은 1939년으로 되어있다. 그에 앞서 결핵을 앓던 이육사는 요양차 1937년 포항송도에서 머문 적이 있고 또 1938년에는 경주남산 삼불암에서도 요양을 한적이 있었다. 영일만과 이육사의 만남은 여기서도 더욱 확실히 밝혀진 것이다.
새로운 명소 탄생기대
최근에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에서 영일만에 청포도 시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문학비는 단지문학적 영향력만 지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대보 장기곶 등대 박물관 앞에 청포도 시비를 건립한다면 그것은 비단 문학적 기념비 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좋은 눈요기 감이 될것이다. 흑은 그 시비를 보기 위해 일부러 방문하는 사람들도 적잖을 지도 모른다. 영일만에 새로운 명소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관에서도 적극적인 지원책을 강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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