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관의 나이로 비록 북풍파(北風派)이기는 하지만 '조선여성동우회'(1924년5월10일 결성)'경성여자청년동맹'(1925년1월21일 결성) 등 여성단체에 가입하고 지방조직을 만들어 전국순회강연을 통해 닫힌 여성들의 눈을 뜨게 했던 백신애가 돌연 시베리아로 방랑의 길을 떠난 것은 1927년이다.
백신애가 여성단체에서 편 구체적인 활동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가입한조선여성동우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벌인 첫 단체로 초창기에는 노동부인을 위한 음악회, 교양강좌등 온건한 활동을 하다가 차츰 서민여성들의 인권옹호, 자유연애와 성의 해방까지 외친 단체이다.
한창 여성운동에 열성을 쏟던 백신애가 그때 왜 혹한의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는지 그 이유는 전혀 알려져있지 않다.
계명대 민현기교수는 논문 '백신애 소설연구'에서 백신애의 시베리아행에 대해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혁명의 땅으로 명명된 그곳을 직접 밟아보려는 백신애의 결심 그 자체가 결단의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추정한다. 말하자면 투쟁의 불길을 더욱 높이려는 '계획된 고행'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낯선 블라디보스토크의 낮과 밤은 20세의 백신애를 곱게 받아줄리 없었고, 약한 몸에 오갈데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며칠을 굶은 백신애는 심한 갈증과 배고픔으로 결국 거리에서쓰러졌는데 러시아 노파가 발견, 닭을 잡아먹이는 극진한 간호로 의식을 회복한다. (구석봉지음, 개화백년의 여인산맥 참고).
그러나 이 고행길에서 백신애는 그곳 관헌에게 밀정혐의로 붙잡혀 조사를 받고 결국은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어쩔 도리가 없이 다시 귀국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는 순간, 일본 관헌에게 체포돼 무자비하고 처참한 고문을 당해 결국 불임의 몸이 되고 만다. 32세의나이로 요절한 원인도 궁극적으로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아버지의 힘으로 경북도 경무부에서 어렵게 풀려난 백신애는 이듬해인 1928년 치료를 받았는데 불편한 몸으로 항일운동의 최전선에 서는 것이 불가능함을 느껴 경북지역에서 제일 큰과수원을 하던 고향집으로 내려와 품팔이 여인들과 함께 노동을 하면서 나라잃은 민족의 서러움을 쏟아내고, 봉건사회 아래 남성의 행패를 고발하는 작품도 썼다.
여하튼 32세에 위장병(일부에서는 췌장암으로 추정)으로 요절하게 만든 백신애의 시베리아행은 그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온 셈이다.
'대구·경북 근대문인 연구'를 집필중인 이강언교수(대구대·국문학)는 시베리아행 등 고통스런 체험 끝에 백신애의 민족의식은 더욱 선명해졌고, 막연하지만 문학에 대한 관심도도깊어갔다고 말한다.
'끌려갔습니다.
순이(順伊)들은 끌려갔습니다. 마치 병든 거러지 떼와도 같이....
굵은 주먹만큼한 돌멩이를 꼭꼭 짜 박은 울퉁불퉁하고도 딱딱한 들길 위로....오랜 감금의 생활에 울고 있느라고 세월이 얼마나 갔는지는 몰랐으나 여러가지를 미루어 생각컨데 아마도 동짓달 그믐께나 되는가 합니다. 이하 생략'
(백신애 단편 '꺼래이' 첫부분)
시베리아를 전전하는 동안, 일제의 총칼에 조국을 잃고 황량하기만 한 남의 땅을 헤매는 수많은 꺼래이(고려인)들의 극한적인 고통까지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였던 백신애였기에 문학적 상상력만으로는 결코 그릴 수 없는 생생한 유랑이민들의 황폐한 삶을 가감없이 담을수 있었다.
고향에 내려와 독학으로 문학수업을 하던 백신애는 22세이던 1929년 사촌동생 박계화란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나의 어머니'를 응모, 수많은 남성 작가지망생을 제치고신춘문예 사상 첫 여성당선자가 됐다.
박화성, 강경애와 더불어 일제 치하에서 친일을 하지않은 여류삼총사로 불리는 박신애가 하루밤만에 휘갈겨 쓴 현대소설 '나의 어머니'가 신춘문예에 당선, 또다시 비범함을 드러내면서 현대여성사에서 여성운동과는 또다른 족적을 남겼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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