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가을의 길목에 서서

입력 1998-09-04 00:00:00

우리는 또 하나의 9월을 막 시작하고 있다. 9월의 초입은 여름의 끝이며 가을의 시작이다.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햇빛과 그리고 선선한 바람을 생각한다. 시냇물은 성큼 차가워지기시작하고 길가의 돌들마저 마치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보이는 시절이다.봄의 화사한 설렘과 여름의 격정을 벗어나 달빛같은 초롱불 밑에서 편지를 쓰며 무언가 차분하게 정돈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글썽일 듯 쓸쓸한 모습의 코스모스들이 길가에 흐트러지는데, 그것은 초봄에 만물의 소생을 알리며 피었다 진 붉은 진달래와노란 개나리꽃무더기들에 관한 추억과 명상 같은 것이기도 하다.

여름하늘의 먹장구름과 뭉게구름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형상이지만 가을하늘의 양털구름은천상도 지상도 아닌 그 어떤 곳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 같은 가이없는모습을 핀다. 가을하늘은 유한과 무한의 접경처럼 멀고 깊어보인다. 마치 하늘 한구석에서폭포가 쏟아질 듯 가슴이 시리도록 푸르러보일 때도 있다.

가을은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는 계절이다. 자연은 농부의 노고를 생각하고 베풀어주며 농부는 자연을 거두고 다듬어준다. 그래서 가을은 온화하다. 사람들은 봄에 과다한 계획을 세우고 여름엔 자연과 싸우며 힘에 부치는 노력을 하지만 가을엔 대천명이다. 그래서 가을은 조용하다.

낮에 보는 가을의 하늘이 멀고 깊어보인다면 밤에 보는 가을의 하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다. 별들이 수정구슬처럼 영롱하고 손에 잡힐 듯 총총하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올려다본 가을 밤하늘의 은하수는 시냇물의 졸졸거림이 들릴 듯 선명했다. 별나라가 가까이 있어보이며, 그래서 오히려 가을에 사람들은 지상을 초월하는 미학을 갖는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봄과 여름, 그리고 겨울엔 무언가 우리 자신의 행동들이 생각 난다.그러나 그 시절의 가을날들에 관한한 딱히 손에 잡히는 기억이 없다. 그냥 가을을 지냈을뿐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한 기억 밖에는 없는 듯하다. 그래서 가을은 독특하다.그러니 가을이란 무엇보다도 어수선하거나 뜨거웠던 계절들을 떠나보내고 차분히 반추하는시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 푸르름이 노랑과 빨강의 단풍색으로 바뀌면서 반전의 의미를 새기게 이끌어준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떠오름이 있으면 기우는 시절도 다가오는 것이다.이번 가을엔 수십년만의 큰 수재를 겪은 뒤인 데다 세계공황에 대한 이야기까지 오고가고있다. 역사의 끝이라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문명도 변화를 요구받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삶의 양식 전반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의 문명 전반에 대한 가을의반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몇 남지 않은 가을의 하나를 맞으면서 새삼스런 감회에 젖는다. 이제 우리의 문명도 가을처럼 성숙한 것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20세기는 인간의 문명이 인간 스스로를 학대하고 자연을 무서운 속도로 파괴한 시대였다면 다음의 세기는 인간이 스스로 화합하고 자연과 조화되는 그런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의 경제적 시련이 그런 변화를 위한 반추의 계기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삼성(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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