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歐美(구미)영화의 등장 - 1093년 활동사진 첫상영

입력 1998-08-29 14:06:00

그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 1919년 3.1운동의 거센 흐름을 타고 한국영화가 탄생한지도 어언79주년. 일제 치하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우리 영화는 광복, 6.25사변 등 격랑의 세월동안민중과 희노애락을 함께 나눈 시대의 반려자였다. '할리우드 키드'로 커가고 있는 오늘의 신세대에겐 역사속의 이야기로 낯설기만한 한국영화의 변천사와 주요 감독.영화에 얽힌 일화등을 시리즈로 되짚어본다.

〈편집자주〉

세계 최초로 영화 탄생의 서막을 알린 곳은 1895년 프랑스. 눈부신 근대과학기술의 발전을바탕으로 '환상의 제조기'라는 별칭을 얻은 영화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구미지역은 물론세계 각국으로 번져나갔다.

'제7예술'로 발전해나갈 사회.문화적 토양위에서 영화가 싹튼 서방과 달리 우리는 불행히도사전 준비없이 구한말 세력다툼을 벌인 강대국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도입돼 절름발이상태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남아있는 문헌상 구미영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03년. 이해 6월23일자 '황성신문'은 당시 동대문에 있던 한성전기회사의 활동사진 상영광고를 싣고 있다. 1898년미국인 콜브란이 한국에서 처음 설립한 이 전기회사가 자체 전차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한 것.

당시 설렁탕 한그릇값인 10전의 입장료를 받고 상영장소도 허름하기 짝이 없는 전기회사 창고였으나 관객의 호응은 대단했다. 흰 광목 스크린위에서 기차라는 시커먼 괴물이 연기를내뿜으며 달리는 신기한 모습은 관객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활동사진 상영을 상품 홍보수단으로 이용한 외국계 상사들은 자사제품인 담배의 빈 갑 등을 입장료 대신 받기도 했다.

'황성신문'의 흥행 광고를 보면 당시 활동사진들은 별다른 내용없이 런던 뉴욕 등지의 전경을 담거나 춤, 마술을 가미한 쇼프로 등 단편적인 오락물들이 대부분이었다. 필름길이도30~50피트(당시 1피트는 1초) 정도로 상영시간도 짧았다.

1903년 7월부터 전통 공연장이었던 협률사(원각사의 전신)에서도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으며, 1907년 최초의 영화전문상영관인 단성사가 문을 열었다.

주로 부유층의 오락거리에서 대중으로 관객이 증가한 1910년대에 외국의 극영화가 본격 수입됐다. '대열차강도' '쿼바디스' 등 외국 무성영화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임시관람소 수준을 벗어난 상영관들이 잇따라 등장, 1912년 고등연예관, 장안사 등이 건립됐다.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작자이자 흥행가인 박승필(1875~ 1932)이 1914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단성사를 제외한 대다수 극장들은 일본인이 소유, 영화 흥행 및 배급을 주도했다.〈金英修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