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 달리 무슨 말을…

입력 1998-08-22 15:06:00

"복구요? 그게 뭔데요? 누가 그걸 해내요?"…신문·방송들이 복구율 몇%라는 얘기를 하고있지만, 현지 주민은 "어느 나라에서 살다 왔느냐?"며 말상대도 안하려 했다. 그리고 그 말이 왜 나왔는지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상주. 농사만을 업으로 삼는 고장. 그러나 올해 가장 큰 비극의 한복판에 서버린 땅. 들판에서 만난 김근수(金瑾洙) 시장의 권유에 따라 '이안천'을 따라 돌기로 했다. 이 하천은 상주서북단의 화북·화남·화서 등 속리산 권역 물을 실어 50㎞나 흐르며 상주 북부지역을 꿰뚫는 강. 이번 수해가 주로 이 이안천 주변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보은(報恩)행 국도와 문장대 방향 지방도가 갈라지는 화서면 밤원 삼거리. 잘지었음에 틀림없어 보이는 거대한 여관이 물에 속을 다 빼주고는 엎어져 있었다. 윗 골짜기에서 덮친 물이 건물 속을 차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 옆에 아주 넓게 퍼져 있는 자갈밭은 며칠전만 해도 논이었다고 했다. 그 위에서는 먼 산에서 굴러온 황소만한 바위들이 어지러웠다.거기서부터 이안천을 따라가는 길가에 성한 것이라곤 없었다. 대부분 도로는 여전히 뜯겨나간 채로 였다. 2차로 중 최소 한 차로는 거의 흙더미가 차지하고 있었다. 인근 산은 군데군데 벌겋게 살집 뜯긴 자국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묘지를 지나온 경우엔, 그 묘지 마저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응급복구가 거의 돼 간다는 소식이 갈수록 진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허구였다. 응급 복구됐다는 길은 그저 차 한대가 겨우 기어 지나갈 정도에 불과했다. 여전히 전주는 그 옆에 누웠고, 논밭은 옛 터라는 표지조차 달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과 비교해야 알아 들을 수 있을까?폭격 맞은 것 같다? 황무지 같다? 언젠가 일부러 찾아가 봤던 미국 네바다주의 광활한 돌자갈 사막, 그 황량한 모습이 되살아났다.

다음 닿은 곳은 외서면 우산리. 폐허의 한가운데 외서초교 우서분교에 이재민들이 있었다.아직도 여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6가구. 2㎞쯤 떨어진 무들·노루목 마을 사람들이라고했다.

"무들에는 5가구가 살았으나 네 집이 완전히 파묻혀 지붕 조차 알 수 없습니다. 집 있던 자리엔 막대를 꼽아 피해 조사용으로 표시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앞들 1만1천여평이야 말 할것도 없지요"… 10일째 교실 바닥에서 사는 정재욱(鄭在郁·73) 할아버지는 아직도 다리가끊기고 길이 막혀 가 볼 수도 없다고 했다.

분교의 선생님은 이재민들이 겨울을 어디서 날 것인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천동이라는마을도 무들 만큼 처참합니다. 그 주민들도 학교에 수용돼야 할 형편이지만, 터라도 지키겠다고 폐허에 천막을 치고 지내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먹을 거리를 장만하느라 부산한 것만이 적막과 외로움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하류 쪽으로 더 내려가자 첫눈에 호화 주택 같아 보이는 길가 외딴집이 지붕만 인채 속을뚫어놓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상주 김시장은 "집 주인은 지붕으로 피해 간신히 구조됐다"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전했다. 집 주인은 "식당을 하려고 건축비만도 1억5천여만원 들여바로 작년에 지었다"고 했다. 대답하는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어 보였다.

이안천 바닥엔 아직도 떠내려와 부서진 차들이 여기저기 내팽개쳐져 있었다. 계림광업소 정광공장은 떠내려온 찌꺼기들로 꼭대기까지 도배돼 있었다.

그 하류 지역은 은척면 하흘1리 호명동. 또다른 계곡물이 이안천으로 합류하는 이곳에선119구조대원들이 바쁜 걸음을 하고 있었다. "물에 떠내려 간 3명의 사체 발굴 작업을 열흘째 하고 있습니다. 내일까지도 못찾으면 낙동강으로 수색 지점을 옮길 참입니다"합류점에 자리한 영수장식당 주인 이광길(李光吉·58)씨는 낙동강 보다 폭이 더 넓어져 버린 이곳 이안천의 지금 강물 흐르는 자리는 논이었다고 했다. 자신은 지난 12일 새벽 4시30분쯤 물이 방까지 차오른 것을 알고 겨우 몸만 빠져 도망쳐 생명을 구했다고. 반면 그 앞에있던 집들은 7채나 없어져 버렸다. 함께 있던 2만여평의 논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씨의 식당에서는 자원 봉사자들이 방바닥에 쌓인 흙을 아직도 치우고 있었다. 집을 떠내려 보낸 이재민들은 건너 산밑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집 꼭대기까지 물이 찬 가운데 대형냉장고가 풍선 처럼 떠 다녔다니, 이씨 식당의 가재 도구가 남아 있을리 없었다. 그 옆에선이제 막 따낼 찰나의 포도들이 정성의 상징인 봉지를 뒤집어 쓴 채 드러누워 버린 나무에매달려 처참함만 더하고 있었다.

공검면 중소2리. 이곳을 보고도 지금 복구를 얘기할 배짱이 생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싶었다. 12만평이나 됐다는 앞들은 이제 사막이었다. 자갈이 얼마나 두껍게 쌓였는지 조차계산을 못하고 있었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46채의 집 중 36채가 지붕까지 물이 찼었다고했다.

이장 안태호(安泰浩·52)씨는 8㎞떨어진 면 복지회관에 옮겨 거처하다 이날 동네를 둘러보러 왔다고 했다. 때문에 상주 김시장은 "이들에게 왕복 차비라도 대줘야 할텐데…"하고 또다른 걱정을 지고 있었다.

"여기 온들 뭣하겠습니까? 들에는 가봐야 돌자갈 뿐이고, 집은 곧 허물어질 참입니다. 와도할 일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동네를 옮겨 다른 곳에 다시 만들어야 할 판입니다. 저 논밭을 어떻게 개인이 복구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도 어렵다고 하니 믿을 곳 조차 없는 것 같아그냥 날짜만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처참하게 만든 뒤 하늘은 이제 가을 분위기까지 풍기며 능청을 떨고 있는 중이다.수재민의 소외감·외로움을 더욱 사무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朴鍾奉·朴東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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