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2월23일. 최송설당여사가 "전재산(당시 32만원)을 사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짓기위한기성회에 쾌척하겠다"는 꿈같은 선언을 하자 김천시내는 물론 온나라 민족지사들이 환호퍼레이드를 벌였다.
최여사가 고향인 김천에 사법서사로 있던 이한기씨(제2대 송설학원재단이사장)에게 기부행위를 위한 재산목록작성을 의뢰한 날로부터 꼭 2년간의 숨막히는 긴장속 기다림끝에 내려진쾌거였다.
일제 치하 전국 30개 교구본사에 불구와 불기를 기증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송설당은 애시당초 전재산을 모 사찰에 시주할 작정이었다. 그때 여사는 73세였고, 후세가 없어들인 양자 마저 패륜아로 일부 넘겨준 재산을 다 날려버리자 파양을 선언했고, 독신으로 살면서 인생의 쓴맛과 무상함을 절실하게 느꼈던 터라 이생 대신 내세를 보장받는 극락왕생을원할 소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더구나 여사의 주변에는 민족 지사들 못지않게 당대 고승들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당시 여사가 기부처로 여긴 절의 주지가 친일 성향을 지녔던 점과 민족의 앞날을 밝힐 동량을 키워야한다는 소명의식이 오버랩되면서 송설당의 재산은 육영사업쪽으로 선회하여 기부했던 것이다.
송설당과 막역지간이었던 만해 한용운 스님도 소의를 버리고 대의를 취하라는 '사소취대(捨小取大)'정신을 촉구했고, 개인의 극락왕생보다 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육영사업에 큰 뜻을세워달라고 부탁했다. 만해외의 지역 지인들도 "한두사람의 어머니보다 몇천명, 몇만명의 어머니가 되시오. 학교를 하나해봄이 어떻소?"라고 간곡하게 교육사업에 투신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송설당이 재물로서 만대에 이어갈 자신의 청정한 이름을 남긴 결정적인 계기인 '이재발신(以財發身)'의 영단은 외부적인 설득 보다 자신과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잘 승화시켰기 때문이었다.
"나는 원래 자수성가하여 남보다 넉넉하게 지내는 편이나 그것을 가지고 일찍부터 무엇을하려고 생각하였으되 오늘까지 가정 형편상 결정을 하지 못하다가 이번에야 겨우 결행을 한것이요, 김천은 나의 고향인만치 그곳을 항상 생각하였으며, 인구가 그렇게 많은 경상북도에중등 학교가 한곳밖에 없는 것을 늘 유감으로 생각하였소"
육영사업에 전재산을 바치기로 결정한 직후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1930년 2월26일자)에서송설당의 애향심과 교육관을 충분히 읽을 수 있으며 고향 김천과 송설당의 김천고보는 한덩어리 한몸이 되어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김천고보가 인가를 얻던 당시 경북도내에는 남자 인문계 고보로서 대구고보(공립) 계성학교(사립) 뿐이었다. 한 여인의 나라살리기의 일환으로 설립된 김천고보는 한국 고등인력 양성의 산실이란 점에서 정주의 오산학교와 더불어 한국 사학의 전당으로 아무리 강조되어도 부족함이 없다.
1931년 5월 9일 사학으로 김천고보가 첫발을 내딛던 날(개교식), 여운형 조만식 김성수 백관수 최규동 등이 직접 참석하거나 축전을 보내면서 "동양 최초, 최대의 여성육영사업가"라는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운형은 개교 5주년 기념및 교주 최송설당 여사 동상제막식에 참석하여 "김천에 들어와서우리의 생명탑이라 할만한 이 고보가 뚜렷이 서 있음을 발견하매 오아시스를 만남과 같아서얼마나 반가운지…"라고 경하하면서 이 학교를 김천의 학교로 만족하지 말고 '영남의 오아시스'로서 민족혼이 숨쉬는 겨레의 교육장으로 키워나가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최송설당의 성품은 매우 고결하였다. 처음 학교를 설립하려고 할때 여사는 독자적인 재산으로 감당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육영사업에 착수하기를 꺼렸다. 이때 어느 인사가 얼마동안 돈놀이를 하여 충당하라고 권하자 여사는 "학생은 민족의 장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상징인데 어디까지나 육영사업은 정재(淨財·깨끗한 재산)로써 하여야한다"고 핀잔을 주어 듣는이가 모두 여사의 고상하고 깨끗한 인격에 경탄하였던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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