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현지서 들여다 본 북한

입력 1998-07-20 14:49:00

지난 6월 6일부터 16일까지 열흘간 북한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위원장 김용순) 초청을 받아한반도통일연구회대표단(5개국 9명)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왔다. 대표단은 모두 해외동포이며 정치학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더구나 나의 방북은 한국여권을 가진 최초의 정치학자였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우리는 북측에서 제시한 일정에 따라 평양시내, 묘향산, 금강산,개성, 판문점, 남포갑문, 원산등 대부분의 관광코스를 일주하였고 기회가 생기면 주민들과접촉을 꾀하기도 했다. 물론 이번 방북은 피상적으로 훑어 본 것에 불과하지만 내가 평소에갖고 있었던 견해나 주장이 현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직접 확인해 보는 기회였다.북한의 에너지난은 대단히 심각했다. 밤이 되면 평양시내가 어둠에 싸이는 것은 물론 가로등이 켜 있지도 않았고 양각도국제호텔 엘리베이터도 전압이 약해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는 날도 있었다.

평양시내 도로에 중앙선은 볼 수 없었고, 평양-원산간 도로에도 차선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으며, 콘크리트 도로가 갈라져 엉망이었다. 또한 평양-개성간 도로는 적어도 3군데 이상이전투기 활주로로 쓰일수 있을 정도로 넓었으나 벤츠 1대만이 목격될 정도로 차량통행이 없었다. 평양시외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짐을 실은 트럭인 것 같았는데, 길에 선 주민들이 그트럭을 이용하려고 돈이나 담배를 주려는 장면도 목격했다.

더구나 놀라웠던 것은 강원도 통천 휴게소에서 만난 젊은 안내원들은 정주영 명예회장을 존경하는 할아버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토론을 하는 동안 북한은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에 대해 불안감을 표출하곤 했는데, 예를 들어 김영삼 정부나 현정부의 본심은 똑같다고 말하거나, 바람론이건 햇볕론이건 본심은 "우리를 먹어 보려는 것이다"며 "우리는 절대로 흡수통일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하곤 했다.또한 북한측은 흡수통일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로써 연북화해정책의 전환과 보안법 철폐등을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나는 '로동당 규약'부터 바꾸어야 하며, 미국을 통해 남한을 배제하려는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 또한 북한이 주장하는 자주성의 원칙, 외세간섭 반대나 주체사상에 모순되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이산가족문제와 관련해서는 당국차원의 이산가족 사업 추진보다 민간차원에서 제3국을 통해제한된 규모의 이산가족사업이 추진되기를 바라는듯 보였는데 이는 당국 차원의 대규모 이산가족사업이 체제위협의 요소로 다가올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북·미 연락사무소개설과 관련한 질문에서 북측은 연락사무소 개설이 지연되는 이유를 미국이 외교행낭을 판문점을 통하여 왕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내가 본 북한사회는 문자 그대로 '실패한 나라'(failed state)였다. 대부분 북한 주민들은 삶에 지쳐 너무나 위축되어 있었고, 평양시내의 건설은 모두 중단되어 크레인은 녹이 슬어 있었으며, 천리마공장은 전면 중단돼 있었다.

심각한 북한의 경제난, 에너지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정신력이 북한사회의 생존력의 원천이 되고 있는 한 북한은 쉽게 붕괴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나는 북한이 체제생존을 위해 개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개방을 하게 되면 '개혁'은 불가피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굳이 개혁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해 왔다. 금번 방북에서 나는 북한사회가 정치·경제·사회 및 대남정책에 있어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만난 북한인들은 그동안 신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흡수통일의 두려움을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것으로 생각된다.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통하여 북한의 안보위협감을 완화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우리 정부의 일관성 있는 햇볕정책도 북한의 개방을 위한중요한 관건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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