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독립여전사 남자현(下)

입력 1998-07-08 14:12:00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남자현과 유관순은 노부인과 소녀라는 연령차만 있을 뿐 뭇남성 못지않게 위대한 독립투쟁을 펼쳐 단군이래 배달민족 여성계에서 애국의 심벌이요, 쌍벽이다.

남자현은 독립여전사들에 대한 일경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 남루하게 위장하여 북만주의 북풍한설과 삼복중의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수천리를 도보로 오가며 오로지조국광복을 위한 한조각 붉은마음을 불태웠다.

만주벌판을 누비던 남자현이 재등실(齋藤實) 조선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로 건너와 혜화동 28번지에 숨어있었으나 사전에 발각, 겨우 몸하나만 빠져 만주로 다시 건너간게 1925년.

때마침 길림성 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 양기탁(梁起鐸), 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만주에 있는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발기하게되자 남자현도 참가, 막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손정도(孫貞道) 목사와 함께 선교활동과 민족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27년에는 안창호(安昌浩) 김동삼(金東三)과 더불어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을전개하다가 길림의 안창호 연설장에서 47명의 독립지사가 체포되는 위기를 맞았다. 그때여사는 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 당국에 교섭, 전원 석방되는 쾌거를 올려 여사의명성은 중국사회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31년에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또다시 체포되자 일본 영사관에 가서 면회하고 간호하며 여러 동지와 중요한 연락을 취하며 석방을 주선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32년에는 일본의 공격으로 상하이사변이 일어나고, 진상조사차 국제연맹 조사단리튼 경이 봉천에 왔을때 왼쪽손 무명지 두마디를 잘라 흰천에 '조선독립원'이라고 혈서를쓴 후에 자른 손가락과 함께 보내어 조선민족의 한결같은 독립 메시지를 인상깊게 전달하기도 했다.

1933년에는 일본 군대가 만주를 석권하고 괴뢰만주국 정부를 수립하던 해, 만주국 전권대사로 일본 육군대장 무등신의(武藤信義)가 관동군 사령관을 겸하여 신경에 주재하자 암살하려고 중국의 늙은 거지로 변장했으나 거사 직전에 밀고로 왜경에게 체포됐던 과정은 전술(23회)과 같다.

갖은 혹형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6개월간을 버틴 남지사의 강철같은 애국의지와 송죽같은 절개는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왜경이 음식을 차입하자거절하고, 원수를 도살하지못하고 적에게 잡혔으니 다만 죽음만을 기다릴뿐 이라고 추상같이 말한뒤 단식투쟁끝에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독립운동으로 점철된 일생을 숭고하게 마쳤다.

조동걸교수(국민대)는 "여성독립운동가의 길을 개척한 남여사는 만주에서 기독교에 입교하여 재만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하고 동포촌락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계몽에 혼신의 힘을 쏟았으며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부상한 독립군을 겨울 내내 간호하여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남지사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에 세워진 '남자현지사 기적비'에서 밝히고 있다.

조교수는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벌판에서 여자라도 강인한 정신이면 이겨낸다는 교훈을 청사에 남겼고, 정부에서도 지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62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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