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증시 폭락… 빛바랜 '동양의 진주'

입력 1998-07-07 14:20:00

폴리에스테르 직물의 세계적 집산지 대구 섬유산업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다. 생산량은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반면 수출길은 꽉 막혀있다. 시장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순수 폴리에스테르 직물은 수요가 한계에 다다른 상태. 이에 따라 최근 수출되는 폴리에스테르 직물은 '종이값'도 안되는 헐값에 투매되고 있는 실정이다.더욱이 7월부터 시작된 폴리에스테르 직물 수출 비수기는 기초체력이 허약한 지역 섬유기업들을 무더기로 시장에서 몰아낼 전망이다. 매일신문은 창간52주년을 기념, 지역 폴리에스테르 직물의 주요 수출시장인 홍콩·두바이·이스탄불 지역을 취재, 지역 섬유수출의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홍콩은 낮 풍경보다 밤 풍경이 훨씬 아름답다. 마천루들이 빚는 색색조명은 화려하다 못해황홀하다. 때문에 홍콩을 찾은 사람들은 홍콩의 야경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요즘 홍콩의 야경은 빛을 잃고 있다. 홍콩 경제가 비틀거리고 있는 탓이다. 반환1주년을 맞은 홍콩경제의성적표는 F학점. 13년만에 처음으로 올해 1/4분기에 -2%성장을 기록했다. 홍콩정부가 발표한 실업률은 5월현재 4.2%. 그러나 홍콩인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실제 지수보다 더 나쁘다. 한 시민단체는 실업률이 최소 12%는 될 것이란 추정치를 내놓고 있다. 홍콩인들은 "홍콩이 중개 무역항으로 발전한 뒤 올해와 같은 불황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홍콩의 극심한 불황은 IMF 구제금융을 받은 한국 및 동남아 국가와도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홍콩섬의 센트럴 일대 및 구룡반도의 침사츄이 등 번화가는 물론 골목길의 상점마다 '대감가(大減價) 50~70% 세일'이 나붙어 있었다. '쇼핑천국' 홍콩의 명성에 금이 간 사실은다이마루 백화점 등 일본계 백화점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폐업한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일본계 백화점은 홍콩 유통업의 절반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일본계 백화점의 철수는 향후홍콩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는 걸 반증한다. 뿐만 아니라 홍콩 서민들이 즐겨찾은 야우마테이 야시장도 풀죽은 모습이었다. 보통 저녁6시부터 자정까지 영업하는 야우마테이 야시장 상인중 상당수는 영업시간이 1시간 가량 남은 밤11시 무렵인데도 시장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상점마다 매출부진 타개책으로 세일을 내걸지만 물건을 사는 사람은 드물었다. 문을 닫은상점도 많았다. 부동산 중개소에도 팔려는 매물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한국 폴리에스테르직물 바이어들이 몰려있는 삼수이포 일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천장 높은 줄모르고 치솟던 홍콩 부동산 값은 40~50% 폭락한 상태. 홍콩증시도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있다. 97년 8월 16,000대 였던 항생지수가 지난달 30일엔 8,400선에 머물러 있었다. 홍콩경제의불황은 동남아 등 아시아 경제위기가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미 달러화에 연동한 고정환율제(PEG SYSTEM)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PEG 시스템은 지난 83년 도입됐다. 중국과 영국이 홍콩 주권반환 교섭을 시작함에 따라 홍콩주민들의 불안이 극으로 치달으면서 홍콩달러의 가치가 급락했다. 이에 당시 홍콩정청은경제회생 처방으로 미 달러화 와 홍콩 달러화의 환율을 1:7.8로 고정시키는 고정환율제를 도입했다. 이 PEG 시스템은 83년이후 홍콩경제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지만 이제 거꾸로 홍콩경제의 족쇄가 됐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확산되면서 아시아 각국은 변동환율제를 채택, 잇달아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헤지펀드들이 아시아에서 유일한 고정환율지역인 홍콩을 집중공략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급격한 금리인상,증시와 부동산 시장 폭락,내수불황을 불러왔다.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조영복 홍콩무역관장은 "홍콩달러화의 고정환율제 해제는 기정사실이며 다만 시기가 문제일 뿐"이라며 "우리 수출기업들도 여기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경제의 회복시점은 언제일까. 홍콩 당국자도 서로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다. 둥젠화행정장관은 앞으로 2년정도 구조조정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본 반면 쩡인추엔 재정사장은 99년 상반기부터 경기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홍콩경제의거품이 제거되고 있는 중이며 구조조정 기간이 필요하다는 데는 홍콩당국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이와 함께 부동산과 증권만으로 홍콩 경제를 지탱할 수 없다고 보고 향후 제조업,특히 정보통신 등 고부가 가치산업에 적극 투자해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홍콩경제의 불황은 우리의 대 홍콩 수출실적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3월까지만 해도지난해 대비 -2.8% 소폭 감소에 그쳤으나 5월현재 -9.1%로 급감세를 보이고 있다. 연간 1백억달러 이상의 무역흑자 지역임에도 불구, 무역마찰이 없었던 홍콩시장이 그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홍콩 수출부진의 국내 요인은 직물·가죽·금 등 우리의 3대 주종 수출품의 수출감소와금융시장 불안(특히 무역금융 혼란)으로 인한 수입원자재값 앙등 때문. 여기에 경기침체에따른 홍콩 자체의 수입수요와 대 중국 재수출물량 감소가 가세했다. 홍콩의 대중국 재수출이 감소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홍콩 중간상들이 반환전후 리스크 관리차원에서 거래규모를줄인데다 중국 제조업체의 기술력이 향상돼 홍콩으로부터의 재수입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중국이 수출용 원자재 수입에 대한 사후관리를 강화함에 따라 홍콩의 대중국수출물량중 중국 내수시장으로 전용되던 상당수 물량의 수출에 제동이 걸린 것도 원인이다.특히 폴리에스테르 직물의 경우 올해 5월까지 대 홍콩 수출실적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43.8%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지난 95년 홍콩시장 점유율이 48.47%이던 것이 96년 45%, 97년 35.74%로 준데 이어 올해는 4월까지 32.76%로 뚝 떨어져 우리의 경쟁국인 대만의 30.25%와 거의 비슷해졌다. 폴리에스테르 직물수출이 이처럼 부진한 것은 널리알려진 대로 중국산 저가품의 생산량 증가와 평가절하를 단행한 대만 등 동남아 각국의 수출공세 때문. KOTRA는 현 추세가 이어질 경우 올해 폴리에스테르 직물의 홍콩시장 점유율이 20%대로 떨어질 것으로 보았다.

KOTRA 홍콩무역관의 조관장은 "원화절하가 폴리에스테르 섬유수출에 덕(德)이 된 게 아니라 독(毒)이 됐다"며 "바이어들의 무리한 가격인하 요구에 대응해 환율과 수출가격을 연동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대구지역 폴리에스테르 섬유수출업체들이마케팅은 물론 외환정보에 어두워 시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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