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정신무장이 밑받침되고,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만 왜놈들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탁견을 보인 항일 여전사 남자현(南慈賢).
남씨는 일제가 만주를 통째 삼키던 폭풍속에서 국제연맹 조사단 리튼경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흰베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고 적은 혈서와 왼손 무명지 두마디를 잘라 보냈다.피로써 한국독립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것이다. 안중근의사가 단지를 한 것처럼 그렇게널리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여성으로서 자기 몸의 일부를 나라독립에 '스스로 바친' 남여사는 이듬해에도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 이순(耳順)이 넘은 몸으로 만주 일본 감옥에 투옥돼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고 단식으로 옥중투쟁을 감행했다.
노구에 보름 이상 끈 단식으로 남여사가 졸도하자 일경은 뒤늦게 병보석을 허가했지만, 후유증으로 결국 이국땅에서 타계, 만주 하얼빈 남강외인묘지에 안장돼있다.
남여사가 결연한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리기위해 단지를 하고 혈서를 쓴 때가 1932년 9월. 환갑을 넘어선 나이였다.
다음해인 1933년에는 일본의 만주괴뢰정부건국기념일인 3월1일에 재만(在滿)일본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암살할 것을 독립투사 이규동(李圭東) 동지와 계획했다. 남자현은 거사에사용할 무기를 구입하려고 2월27일 중국인 노파로 변장, 가슴에 폭탄과 무기를 품고 하얼빈외곽 정양가(正陽街)를 지날 무렵, 왜경에 탐지되어 일본 영사관에 수감됐다.
60이 넘은 여성의 몸으로 6개월간이나 온갖 혹형에 시달리고 모욕을 받아오던 그는 그렇게허무하게 무너질 수 없었다. 최후수단으로 8월에 감행한 옥중 단식이 보름이상 계속돼 사경을 헤매다 석방, 적십자병원의 치료를 거쳐 조모(趙某)씨의 여관을 떠돌며 동지들의 구완을받았지만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기고 1935년 8월22일 새벽서거했다. 조국광복의 한을 품은 채 62세를 일기로 고요히 잠들었다.
남자현(1872~1935).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여류투사가 적지는 않지만 남자현은 그 항쟁방식이라든지, 이념이 보통여류투사와는 확연히 달랐다. 3·1운동이 터지던 47세에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세상을떠날때까지 오직 '한국독립'만을 외치다 눈감은 그의 독립운동은 보다 진취적이었고, 시대감각에서 앞서갔다.
경북 안동군 일직면에서 영남의 석학으로 알려진 통정대부 남정한의 딸로 태어난 그는 성품이 단정하고 총명하여 7세에 국문을 읽었고 곧 대학(大學) 소학(小學)을 뗐다. 당시 조혼풍습으로 13세면 시집을 갔으나 남자현은 19세에 의성출신 애국청년 김영주(金永周)에게 늦시집을 갔다. 결혼 5년만에 남편 김영주가 민비시해사건에 격분, 의병항쟁에 가담했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을때 남자현의 나이 겨우 23세, 청상과부로 3대 독자인 유복자(김성삼·金星三, 김을동이 지은 안동판 독립사 102쪽에는 김영달·김영달(金英達)로 기록됨)를 가졌다.유복자를 양육하면서 시모 봉양에도 지성을 다한 그는 경북 청송 진보에서 효부로 표창되기도 했다.
3·1 운동시에는 군내를 편력하며 여성계몽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일제의 무력탄압을 견딜수 없어 1919년 4월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남편의 거룩한 사랑을 되갚고,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남편을 소생시키는 길은 침략자 일본을 타도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남씨는 고향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외치고 몽매한 부녀자들에게 독립정신과 애국애족의 길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보다 폭넓게 자리잡고 자기의 뜻을 펴서 남편의 원수를 갚고 조국에 이바지할때라고 판단,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가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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