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기원전 2세기의 고조선부터 시작해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으로 이어져내려온 우리민족의 명산으로서 유서가 깊다. 그러나 금강산지역 백성들은 그 빼어난 절경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금강산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중앙의 고관대작들을 대접해야 했고 명산인 탓에 곳곳에 자리잡은 사찰들이 가져오는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일본을 비롯한 외세는 금강산 지역을 노략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조선시대 금강산 지역 백성들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외국사신들과 관료양반들의 길안내, 가마매기, 짐운반, 식사보장 등 뒤치다꺼리에 밤낮없이 동원됐다.또 산삼, 녹용, 꿀, 범가죽, 표범가죽, 돌버섯 등 희귀한 특산물과 생복, 대구, 송어 등 수산물을 공물 또는 진상품으로 바쳐야 했다. 예를 들어 18세기 강원도 백성들이 부담하는 산삼값은 매년 토지 1결당 30량 이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무거웠다.
더욱이 금강산에는 그 신비로움으로 인해 대형 사찰들이 많았고 왕실은 이 곳에서 국왕이나왕비, 왕자 등의 장수, 안녕, 명복을 비는 불교의식을 자주 가졌다. 그 노동력과 비용은 당연히 이 지역 백성들이 담당해야 했다.
일부 백성들은 이같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기도 했으며 폭력투쟁에 나서기도했다.
18세기초 중엽에 강원도 산간지대에서는 농민 폭동군의 활동이 계속됐다. 그 활동의 범위는고성, 섭곡, 안변, 회양, 이천 등을 포함했다. 1746년 조선조는 폭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철원에 방어사를, 회양에 방수사를 뒀다. 이천, 평강, 김화, 고성, 섭곡에는 각각 방수장(고을원이겸직)을 설치했다.
또한 금강산은 외세 침탈의 주요 목표물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 모리 요시나리가 이끄는 침략군의 한 무리는 금강산의 큰사찰들에는 금은보화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유점사를 비롯한 사찰에 침입,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신계사도 불탔고 백성들도 희생됐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2년부터 일제는 외금강에서 중석광을 비롯한 각종 광석을 캐내고 막대한 양의 목재를 남벌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일제는 또 내금강 일대의 자연을 파괴하고는 요리점, 여관 등 위락시설을 지은뒤 돈벌이에나섰다. 그러나 가난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금강산 구경과는 거리가말았다.
고관대작의 횡포나 일제의 침탈과는 달리 금강산에 관심을 기울인 인물들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실학사조가 형성되면서 실학자 이중환, 김정호, 성해응 등은 금강산에대한 자연 및 인문지지리적 연구사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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