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개인거리-
연전에 작고한 한창기씨를 나는 종종 '한국의 문화 영웅'이라고 부르곤 한다. 일찍이 한국브리태니커 회사 사장을 지낸 그는 자신의 손으로 창간한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같은 잡지를 통하여, 잘만 가꾸어 쓰면 우리말의 쓰임새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본을보인 분이자 녹차와 판소리의 대중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기도 하다. 전남 보성 출신인이 분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안동에 가서 참 희한한 경험을 했어요. 어느 양반집 고택을 찾아가, 김 아무개 선생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베잠방이 차림으로 마루에 앉아 있던 그 양반, 일언반구도 않고 방으로 쑥들어가 버려요. 무안했지만 나와 버리기도 뭐하고 해서 마당에 한동안 서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 양반, 바지 저고리 제대로 갖추어 입고 나와서야 비로소, 내가 김 아무개 올시다, 대청으로 오르시지요, 하는 거예요 이형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요?'
나는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안동 일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풍속이다.형님들과 함께 의성군에 있는 먼 일가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숙항(叔行)인 어른은 세상 떠나시고 내외가 초등학교 교사인 손 아래 동항(同行)이 지키는 집이었다. 찾아갔지만 논매기철이라 젊은 주인 내외가 집에 없었다. 물어서 논을 찾아갔다. 내게 아우뻘이 되는 주인 내외는 논을 매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 그 아우를 논 한가운데다 일으켜 세우고 이쪽 이름을대었다. 깜짝 반가워하면서 논둑으로 걸어나올 줄 알았는데 반응이 뜻밖이었다. 아우는 이렇다 저렇다는 말 한마디 없이 눈둑 옆으로 흐르는 개울 가로 뚜벅뚜벅 걸어갔고, 계수 역시아무말없이 마을 쪽으로 잰 걸음을 내달았다. 논둑에서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었더니, 아우는 개울에서 세수 말끔하게 하고, 둥둥 걷었던 바지가랑이 내려 단정하게 옷손질한 연후에야 논둑으로 나왔다. 옷매무새 바로 잡은 계수는 집에서 돗자리를 한 닢 들고 나왔다. 아우와 계수는 그 돗자리 논둑에다 편 다음 우리 앉히고 절한 뒤에야 비로소 안부를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의관을 정제하지 않은 내가 아니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베잠방이 차림으로는 바깥 사람을 만날 수 없다. 내 젊은 아우 내외가 그랬듯이, 논물이 튀어 얼룩진 얼굴, 바지 둥둥 걷어올린 차림으로는 족내(族內) 형님들을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안동의 그 양반은, 의관 정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입성 제대로 갖춘 연후에야, 내 아우 내외는 세수하고 돗자리 갖다 깐 연후에야 비로소 외인과의 거래(去來)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듯이 외인에 대해 율기솔신(律己率身)을 다하는가? 왜 엄격한 개인 거리를 유지하려 드는가? 상대방에 대해 같은 정도의 율기솔신과 개인 거리를 요구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내가 이렇듯이 예의를 다하니 내게도 예의를 다해주기 바라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있는 것이다. 다소 투박하고 퉁명스럽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하지만 새 세대에게 이 풍속 좇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사는 모습 달라졌고, '에토스(공생 윤리)' 또한 현저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 거리는 엄연하게 존재한다. 이쪽에서 개인 거리 지켜주지 않으면 저쪽에서 개인 거리 무시하고 쳐들어 온다. 개인 거리를서로 무시하는데서 얼마나 많은 갈등이 빚어지는가? 사람들이 개인 거리 무시하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세태를 나는 걱정한다.
'너, 얼굴 아주 못쓰게 되었구나''내 얼굴 못 쓰게 되는데 뭐 보태준거 있냐?'이런 화법이 우리 곁에 흔하다. 상대가 상처 받을 줄을 뻔히 알면서도, 나 오늘 싫은 소리한마디 하려는데, 이렇게 말머리 트는 짓은 얼마나 위험한가?
나는 새 세대를, 위로는 무례하고 아래로는 잔인한 세대라고 부른다. '심정적 개인거리 지키기'라고 하는 새 공생 윤리, 지금 가르치지 않으면 위로는 더욱 무례해지고 아래로는 더욱잔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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