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에 안맞는 직업 틀에 박힌 일은 싫다

입력 1998-06-10 14:24:00

대구 일신학원 강의실. 좁은 의자에 앉아 수능시험 문제지를 들고 있는, 왠지 어색해 보이는'학생'들이 군데 군데 눈에 띈다. 이들은 학사 출신 재수생들. 그럼에도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한참 동생뻘인 재수생들과 새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외환 위기가 몰고 온 사상 최악 취업난 속에 생겨난 새로운 재수 풍속도이다.

최상엽씨(이하 가명)는 올해 29살. 2년 전 결혼까지 한 어엿한 가장이다. 그런 그가 대학 졸업 후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 두고 그 힘들다는 재수를 시작했다. 사서 고생하는 이유는 뭘까. 상엽씨의 3년간 직장 생활은 하루 하루가 고민의 연속이었다. 틀에 박힌 업무는 무미건조 했고 다니던 종금사도 언제 구조조정 회오리에 휘말릴지 앞날이 불투명했다.아무 생각 않고 그냥 다닐까, 사표를 던질까, 그만 두면 무슨 일을 하나. 홀몸도 아닌데…이런저런 고민으로 밤잠을 못 이룬 날이 많았다. 그러던 끝에 아내에게 생계의 짐을 지우는미안함을 무릅쓰고 인생에 새 도전장을 던졌다. 그의 꿈은 변호사. 오늘도 각오를 다진다.다시 사회에 나가면 봉사하며 치열하게 살자··.

대학 졸업 후 2년간의 외국어학원 강사 생활을 접고 재수의 길을 택한 김경아씨(27·여).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고 나름대로 보람도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수익만 쫓는 학원의 속성에 환멸이 느껴졌다. 학원의 '이익'에 도움이 못되는 강사들이 자리를 잃을 때, 언제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지 불안하고 허탈했다.

"이런 곳이라면 얼마 동안 더 버틴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몇달 동안 계속된 고민과갈등. 부모님의 걱정어린 만류도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다 지난 2월 안정된 직장을 찾기로 마음 먹었다. 교육대학에 진학, 훌륭한 교사가 되는 것이 경아씨의 새로운 꿈. "다시 시작한 입시공부가 힘들지만 사회에서 마음 고생을 한 것에 비하면 참을만 하다"고 했다.지난해 서울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한 강성미씨(26·여). 남들이 부러워 하는 명문대 출신.그러나 그녀에게도 취업 문턱이 높기는 마찬가지였다. 취직을 했다는 같은 학과 친구들의직장도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곳.

몇 달간 학원 강사를 해봤지만 당초부터 내키지 않았던 일. 무슨 일을 해야할지 판단 조차힘들었다. 그동안의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짓누르는 좌절감. 대학 때도 점수에 맞춰 진학하느라 결국 학과 선택을 잘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 해야 했었다.

고민 끝에 의대에 다시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학원 문 앞에서 머뭇거리기를 몇차례. 용기를 내 지난달 수강 등록을 하고 몇년 동안 손놓았던 공부를 시작했다. 이런 '어른재수생'들이 후배 학생들에게 암시하는 말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올바른 진로 선택인지,치열함과 진지함, 그리고 도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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