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1920년대 여성교육단체

입력 1998-05-27 14:10:00

1926년 2월 20일 대구여자청년회가 구 대구 조양회관(달성공원앞에서 망우공원으로 옮겨서광복회관으로 바뀜)에서 연 여성강연회의 한 장면. 연사 조성은(趙成恩)이 강단에서 여성청중을 모아놓고 열띠게 강연한다. 연제는 '나'(我). 나? 나라니….

대부분 여성들이 집안에 묻혀살던 20년대, 여성의 자아의식을 나타내는 '나'를 주제로 한 여성강연회를 열었다고 동아일보 1926년 2월24일자는 기록하고 있다. 이 여성강연회는 여성해방을 외친 여성혁명가 정칠성(丁七星·22회 게재 예정)이 주도한 대구여자청년회가 백두산나무를 베어 지었다는 조양회관에서 개최한 것이었다.

또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하고 대구신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대한애국부인회 대구지부장을 역임하면서 민족독립과 기독정신 전파에 앞장섰던 유인경(兪仁卿)은 '지혜'를 테마로대구남성정예배당(약전골목 대구제일교회)에서 여성강연회를 열었다.

수난을 받고 있는 민족을 구할 지혜, 아직 잠자고 있는 여성들의 인권을 보듬어줄 지혜, 그지혜를 여성에게서 구하는 움직임이 70여년전 대구 한복판에서 벌써 일었던 것이다.유인경을 초청, 여성강연회를 펼쳤던 대구기독여자청년교육회는 이보다 한달전인 1922년 2월23일 더 뜨끈뜨끈한 주제로 조선지식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조선인이 살아나려면 교육이 급합니까, 실업이 급합니까"

교육을 통해 나라를 살리는게 빠른지, 물산장려를 통한 실업활성화를 통해 나라를 살리는길이 빠른지 토론회를 통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려는 뜻을 대구여성들이 실천한 것이다.

이날 토론회에는 나정수(羅貞洙) 이영옥(李永玉) 최숙이(崔淑伊)가 교육편에, 김수렬(金守烈)박수의(朴守義) 상복경(尙福卿)이 연사로 등장하고 조영수(趙永守)가 심판을 맡았다.주권을 빼앗긴 민족의 여성들이 가진 단 하나의 염원인 나라구하기의 방법으로 조선인의 급선무가 교육이냐 실업이냐를 도마위에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 대구기독여자청년교육회는 이외에도 '참사람' '조선이 구하는 여성'등을 테마로 올려 강연회를 계속했다.

재미와 사람끌어모으기에만 혈안이 된 요즘의 여성강연회와는 달리 당시대가 요구하는 묵직한 주제를 선택, 여성들의 교육계몽에 앞장선 것이다.

전술(19회)한 1920년대 종교적 여성단체에 이어 경북지방 여성들의 계몽에 활발한 움직임을보인 단체는 '대구여자청년회' '대구기독여자청년교육회' '청송여자청년회' '하양여자친목회' '금릉여성회' '금릉여자청년회' '김천여자청년회'가 대표적이었다.

이들 여성교육단체는 지적인 면에서 남성에게 뒤떨어진 여성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창립된단체로 그중에는 기독여성만으로 모여진 단체도 있다.

전술한 종교적 여성단체와 같이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거나 야학 강습소 등을 개설하고전람회 원유회 등을 통해 여성을 자각시키고 견문을 높히는 일에 주력했다. 연예·오락활동은 별로 많지 않았으나 금릉여성회와 김천여자청년회 등에서 행하는데, 그일례를 들면 여러 단체가 공동으로 1927년 5월4일 김천 지좌에서 원유회(=소풍)를 갔다고당시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사립문을 넘어 멀리까지 여성들이 나간 소풍모습이 신문기사거리로 등장한 것이다.금릉여성회와 김천여자청년회는 한걸음 더 나아가 부인견학단을 조직, 김천우체국·식산은행·금융조합·도립병원·수도저수지·전기회사 등을 견학하면서 산업과 사회에 대한 여성들의 이해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지역별로 보면 강연회나 토론회는 대구부에서, 야학회나 강습회는 대구부·청송군·김천군등에서, 연예·오락활동과 부인견학은 김천군에서 활기를 띠었다.

전체적으로 볼때 경상북도에서는 대구부와 김천군이 가장 활발한 여성운동을 펼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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