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장후보 인물탐험-자민련 이의익후보

입력 1998-05-20 14:52:00

'추진력 뛰어난 통 큰 소신파','의리의 사나이, 돌쇠'이의익(李義翊)후보의 삶을 특징지우는 몇몇 수식어들이다. 전자가 93년 대구시장을 끝으로마감한 31년간의 공무원 생활과 최근의 의원직 수행 등에서 그의 업무 스타일을 짚어보게하는 상징적 표현이라면 후자는 그의 인간사를 가늠할 또 다른 수사가 되고 있는 셈이다.61년 경제기획원 서기보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청년 이의익은 서울대 법대에다 고시출신들이즐비한 경쟁사회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진다. 전국 2등으로 사무관 승진시험에 합격한 것도 이같은 집념의 산물.

30대 중반에 서울시 통계과장에 이어 인사, 총무과장 등 소위 노른자위 부서로만 옮겨 다녀고(故)구자춘(具滋春)당시 서울시장의 편애가 작용했다는 구설이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보는 73년부터 구시장이 공직에서 물러서는 79년까지 줄곧 서기관으로 근무했었다며 이를일축한다.

그의 선굵은 소신행정은 83년 일선 행정기관장으로서 첫발을 딛는 창원시장 재직 시절부터위세를 떨친다. 당시 농촌지역 창원을 대단위 중화학기지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주민과의마찰이 적지 않았지만 몸사리지 않는 행정으로 신도시 창원으로의 새 모습을 일궈낸다. 이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이 소떼를 몰고 시청으로 쳐들어 온 일도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은 일화도 있다. 마산시장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항구확장 매립공사추진 등 도시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92년, 민자당 내무전문위원으로 파견 근무하던 그는 대통령 선거에 기여한 공로로 93년 문민정부의 첫 대구시장으로 부임한다.'일하는 시장, 일하는 공무원'을 모토로 내건 그는 현장행정을 강조, 새벽 일찍 일어나 지역 구석구석을 둘러본 뒤 출근하는 부지런함을 보이기도했다. 비산염색공단 폐수처리장을 2배로 늘리고, 삼성자동차 유치의 길을 낸 것 등은 그가내세우는 공적. 반면 시청앞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한 일 등으로 일각으로부터 과시용 행정을 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는 고속전철 대구구간 지상화반대, 대구 동을 보선에서의 민자당 패배 등으로 10개월만에 옷을 벗는 아쉬움속에 관료생활을 마감했다.이후보의 인간적 체취는 특히 학창시절 등에서 풍겨 나온다. 부친은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경북지부 대표를 지낸 이세영씨로 이때문에 어린시절 그는 늘 쫓겨다니는 아버지와 주재소에 끌려가 매를 맞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이미 5세때 신사(神社)에 돌을 던질만큼 항일사상이 강했다. 또 학창시절 공부못지않게 싸움도 잘했던 그는 약한 친구가 맞고 오면 대신 응징하는 정많고 의협심 강한 소년이었다는 것이 동문들의 전언이다. 특히 친구를 좋아해 경북고 동기생인 곽동환(곽병원 부원장)씨의 여동생인 정애씨와 결혼한 이후에도 한동안 월급을 제대로 갖다준 적이 없었다고. 정애씨는 숙명여대재학중 총리실에 근무중이던 그와 만났다. 그러나 이 바쁜 와중에도 부인과 함께 주말이면 영화를 즐길 정도로 가정적이면서도 자상한 모습도 가지고 있다고. 그러나 솔직하고 활달한 성격탓에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일도적지 않은 편. 슬하에 찬(28·여), 한희(27)남매를 두고 있으며 딸은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과 결혼해 살고 있고 한희씨는 아직 미혼이며 삼성물산에 근무하고 있다.

〈裵洪珞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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