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영남유림 제휴"

입력 1998-05-13 14:14:00

흥선대원군과 인조 반정이후 2백여년간 권력에서 소외됐던 남인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이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색다른 연구가 나와 주목을 끈다.

정진영 동명정보대학(부산) 교수는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가 펴낸 '한말 영남유학계의 동향'에 게재된 '19세기 후반 영남유림의 정치적 동향' 논문에서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대원군과 그동안 소외됐던 영남유림이 서로 필요에 의해 상호 제휴관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흥선대원군은 초야에 있을때 영남지역을 두루 순방했다. 상주의 유후조(柳厚祚)의 집에 머물며 영남의 많은 인사들과 교유했다. 또 안동의 여러 가문을 돌아보았으며 의성의 신석우(申奭祐)와는 서로 허물없이 지내기도 했다. 경주 양동과 봉화의 진양강씨 가문에는 대원군이머물면서 썼다는 글귀가 남아 있다.

영남유림은 인조반정과 갑술환국(숙종 20년·1694년)을 계기로 중앙 무대로의 진출이 사실상 막혀 있었다. 특히 영조 4년(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란으로 영남은 한때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대원군의 등장은 영남 남인에게 정치적 재기를 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안동 김씨등의 세도정치기에 8·3%에 불과하던 영남유림(남·북인)의 비율이 대원군 집권하에 18%로 크게 확대됐다. 정교수는 영남과 대원군간의 제휴관계를 3번에 걸친 영남만인소로 설명하고 있다.

고종 8년(1871년) 영남유림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반대하는 '서원훼철 반대만인소'를 올렸다. 반대만인소는 대원군의 정책을 정면에서 반대하는 것이고 상호 제휴관계를 부정할 수도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교수는 대원군의 국정 전반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점, 만인소가 한번으로 종결됐던 점을 들어 "대원군에 대한 '응석'같은 성격이 강했다"고 지적했다. 대원군도 만인소 문제로 영남인을 아무도 처벌하지 않았다.

특히 대원군과 영남유랑의 밀접한 관계는 대원군의 실각으로 전개된 '대원군 봉환만인소'(고종 12년·1875년)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고종의 대원군에 대한 효를 명분으로 전개되고있었지만 사실은 대원군의 복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고종의 친정(親政)에 대한 비판이며대원군에 대한 기대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봉환만인소는 10개월간,4-5차례에 걸쳐 전개됐다. 이후 '척사(斥邪) 만인소'(고종 16년. 1881년)도 이같은 양상을 띤다.

그동안 한말 정치사는 중앙과 당쟁사 중심으로 기술돼 대원군과 영남향촌사에 대한 관계 연구가 없었다. 정교수는 영남 유림의 대원군과의 관계 밀착에 대해 "권력에서 소외된 영남유림의 재기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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