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아픔 보듬는 재기터전

입력 1998-05-07 15:57:00

실직 5개월만에 가까스로 구한 직장에 첫 출근하던 날 유모씨(45.대구시 동구 신평동)는 설레이는 마음 한켠에 착잡한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중소기업 사장에서 섬유공장 단순노무직으로.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세월들이 버스 창가를 따라 흘러갔다.

학력이라곤 고교 2년 중퇴가 전부 이지만 독학으로 공부를 계속한 끝에 83년 서울 한 무역회사 해외사업부에 취직하면서 유씨는 플랜트 수출과 인연을 맺었다. 86년 독일 무역회사한국지사장을 거쳤고 87년엔 해외영업 경험을 살려 산업기계설비 수입판매회사를 차렸다.하지만 10년여간 끌어오던 회사는 외환위기 속에 급기야 문을 닫게 됐고 유씨는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참으로 열심히 살아온 세월들이었는데.

해외영업엔 자신 있었던 그는 실직 후 꾸준히 이력서를 냈다. 하지만 유씨가 문을 두드린회사들은 하나같이 나이를 문제 삼았다. 재취업 정년은 35세. 번번이 퇴짜를 맞으면서 절감한 사실이다. 화려한(?) 경력도 재취업엔 걸림돌이 됐다. 근무지역도 상관없고 월급도 주는대로 받겠다고 했지만 사장까지 거친 그를 채용할 회사는 없었다. 수차례 쓴잔을 마시고 경력을 살려보겠다는 소박한 꿈을 버린 뒤에야 비로소 섬유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아직 유씨의 가족들은 그가 실직했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아침마다 출근부에 도장찍듯이꼬박꼬박 나왔다가 저녁이면 들어갔기 때문. 낮시간동안 그가 시간을 보낸 곳은 대구시 달서구 두류동 삼익신협 IMF쉼터방. 매일 실직자 20~30명이 찾는 곳이다. 유씨가 꾸준히 구직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고 결국 재취업에 성공하도록 도와준 희망터.

삼익신협 IMF쉼터방은 여느 쉼터방보다 이용이 까다롭다. 실직자라면 누구나 찾아올 수 있지만 취객은 절대사절. 술을 마시면 패배의식에 젖어 질펀한 신세타령이나 늘어놓기 때문이라는 것이 쉼터방 운영을 맡은 삼익신협 박종식 전무의 얘기다. 실직은 패배도 낙오도 아닌재도약을 위한 준비단계일 뿐. 쉼터방 사람들의 이같은 생각 덕분인지 이곳을 이용하던 실직자 20여명이 재취업에 성공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좀더 의미있고 생산적인 일을 시작할 여유도 가졌다. 그래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바자회를 준비했다. 지난달 11일부터 집에서 입던 옷가지며 생필품을 구해 삼익신협 앞에서 팔기 시작했다. 열흘 가량 장사한 끝에남은 돈은 8천원. 물론 돈을 벌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매일 나와 물건을 펴고 손님을상대하고 또 하루를 마치며 물건을 정리하고. 경험을 살려 장사에 나설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 아니겠는가.

실직자들의 노력에 삼익신협측도 팔을 걷어붙이고 돕기에 나섰다. 조합원이 운영하는 의류도매점과 연계해 쉼터방 사람들이 위탁판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수익금은 전액 쉼터방 몫이다. 6일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바자회 준비를 맡은 쉼터방 회장 김상운씨(38.대구시 서구 내당동)는 의욕이 남다르다."쉼터방 사람들은 지금까지 하루 종일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인 대량실업사태에 벌써부터 넋놓고 있을 순 없는 것 아닙니까.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열심히 살다보면 기회가 주어지겠죠"

〈金秀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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