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풍상 다 겪고 우뚝 선 구봉

입력 1998-04-30 14:11:00

태백에서 늑골처럼 뻗어나와 서쪽으로 흐르던 산맥은 한순간 남쪽으로 그 긴 허리를 비틀어풀어 놓는다. 기세좋게 내려 뻗기만하다 때로 제 품새에 싫증을 느낀듯 멈칫멈칫 등줄기를부풀린다. 그 힘에 우뚝선 명산들. 소백산-월악산-속리산. 명산을 순례하며 산과 함께 세상을 굽어본다.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조화. 소백산맥은 그래서 더욱 풍요롭다.제2의 금강으로 불리는 속리산. 우리나라 중심부에서 불쑥 머리를 든 속리산은 험준하면서도 수려하고 유수(幽邃)하면서도 명결함이 장관이다. 본시 한 땅이되 충청도 땅과 경상도 땅이 날개마냥 속리산의 동서편에 펼쳐져 있다. 해발 1천m가 넘는 주봉 천황봉과 절경인 문장대(文藏臺)를 정점으로한 속리산은 예로부터 봉우리가 아홉이라 구봉산으로도 불렸다.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관음봉등 봉우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용자를 뽐내고 입석대, 경업대,학소대같은 기암절벽이 서로 시기하듯 아름다운 자태를 겨루고 있다. 신라때는 속리악이라불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명산. 산 곳곳에 수없이 널려 있는 거대한 바위들이 머리에하늘을 얹고 바람을 얹고 나무마저 얹어 억겁의 세월을 견디어 왔다.

속리산 등성을 타고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이 서로 갈라진다. 전체면적 1백5㎢의 7할가까이 충북이고 경북지역은 3할을 조금 넘는 수준. 천황봉과 문장대는 행정구역상 경북 상주군 화북면 상오리와 장암리에 속한다. 소백산이 그러하듯 속리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서남쪽의 물은 금강으로 흘러들고 북쪽은 남한강에, 동쪽의 물은 낙동강에 모인다. 서로 가르는 일이 다반사인 사바세계에도 자연의 혜택은한치 어긋남이 없다.

지난 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속리산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한때 보은을 거쳐 고려 태조때 닦았다는 열두구비 말티재를 넘어오던 길이 전부였다. 요즘엔 상주쪽에서접근하는 도로가 개설돼 사방에서 쉽게 다가설 수 있다. 하루도 쉼없이 사람들은 보은에서상주에서, 멀리 대구와 서울에서도 명산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 하지만 사람들은그저 산에 발을 들여놓거나 산그늘에 잠시 몸만 담가볼 뿐이다. 속리(俗離), 속리, 속리… 그깊은 뜻이 염불마냥 귓전에 닿을듯 하지만 종내 알 길이 없다.

큰 산은 대찰을 낳는다 했던가. 속리산은 천년고찰인 법상(法相)종찰 법주사(法住寺)를 품고있다. 연기설화에 전해오는 '법이 머문다'는 뜻일까! 어떻든 법주사는 개산(開山)이래 용화세계를 기원해온 미륵도량이자 왕사(王寺)로 유명하다. 세종임금이 머물고 세조가 자주 찾았다는 이 절 어귀에는 소나무마저 정이품의 품계를 갖고 있어 옛날 그 위세를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경내에 이르면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편액을 건 일주문이 앞서 맞이한다. 이어금강문, 사천왕문을 차례로 넘어서면 크고 작은 법당과 당우로 절마당이 조화롭다. 사천왕문왼편에 순종임금때 다시 세운 철당간지주가 하늘을 찌를듯 하다. 국보인 팔상전과 쌍사자석등,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사모지붕으로 된 특이한 양식의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지척.깨어진 와편 하나, 석물 하나에도 고승대덕들의 부드러운 손길이 잡힐듯 느껴진다.초파일을 며칠 앞두고 절에는 온통 형형색색의 연등이 가득하다. 슬쩍슬쩍 바람에 흔들리며부처님의 자비가 온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는듯 하다. 장쾌하게 우뚝 솟은 청동미륵대불이 그윽한 눈길로 절을 두루 굽어보고 있다. 키 나직한 오백나한이며 종루까지 구석구석 살펴보듯 미륵불의 상호가 인자하다. 용화정토에 이르러 깨달음의 법을 설하시는 미륵부처님이 법이 머무는 곳에 내리신듯 하늘도 환하다. 미륵불 기단아래 조성된 용화보전에는 법주사의 갖가지 문화재가 보관돼 있다. 먼 길 왔다며 직접 신법천문도와 선조어필등을 자상히설명해주던 주지 혜광스님은 "선현들의 불법과 나라사랑에 제대로 답하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합장에 또 합장.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속리산에는 자연의 목소리가 더욱 깊숙이 잠겨 있다. 희귀식물인 백색 진달래와 금낭화,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등 1천2백여종의 동식물이 속리산의 속내를 설핏 보여준다. 계절은 이미 4월을 넘어서는데도 정상에는 개나리, 진달래가 한창이다.거스르지 않고 탁하지 않는 산천을 닮아서 일까. 속깊은 속리산과 소백산맥의 허허로움에기대어 살아가는 온갖 생물들은 인간세상의 옹졸함을 꾸짖는다. 법이 머무는 곳에서 미처법을 보지 못하고 오리숲을 걸어나가는 인간들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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