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윤기의 세상읽기

입력 1998-04-21 14:24:00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처칠총리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왕에게 영국이 자랑하던 수제품자동차 롤스로이스 한 대를 선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단 한차례 그 롤스로이스를 시승했을 뿐, 처칠의 선물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고는 아우에게 줘 버렸다고 한다. 까닭이 재미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운전석 옆 자리가 상석이란다. 왕이 롤스로이스의 상석에 앉아보니, 자리가 비좁기도 하려니와 운전사의 왼쪽에 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영국제 자동차의 운전석은 우리나라 자동차와는 달리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사막의 로렌스'라고 불리는 영국의직업군인이자 탐험가인 T E 로렌스가 아랍인들을 규합하여 터키에 저항하고 아랍인들의 독립을사사로이 지원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에 그토록 공을 들여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이권이 미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 것과 롤스로이스 사건은 무관하지 않다고 들었다.처칠 같은 인물이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게 선물을 주면서 그 선물받을 사람 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정성이 전혀 실리지 않은 선물을 주었으니 이런 비례가 다시 없다.

두루미와 여우 이야기. 흘러간 옛노래를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여우가 두루미를 만찬에 초대한다. 여우는 두루미 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판판한 접시에다음식을 차린다. 두루미의 긴 부리로는 도무지 그 음식을 먹을 수 없다. 화가 나서 돌아간 두루미가 며칠 뒤 여우를 초대한다. 두루미는 모가지가 긴 병 속에다 음식을 넣어 대접한다. 주둥이가짧은 여우로서는 도무지 그 음식을 먹을 수 없다. 곰바우들이 아닌가.

'로마에 가거든 로마인들 하는대로 하라'는 서양 격언은 이제 빛을 잃었다. 두루미는 여우의 집에서 여우가 하는대로 하려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우도 두루미의 집에서 두루미하는대로 하려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가는 여우는 손님을 난처하게하지 않는다. 앞서 가는 두루미는 같은 스트레스를 안김으로써 여우에게 복수하지는 않는다.로마에 가거든 로마인들 하는대로 하라는 격언은 이렇게 바뀌고 있다.'로마인들이 오거든 로마식으로 대접하라'

지난3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해상 시상식이 있었다. 시상식의 주체는 조계종이었다. 시인 고은, 경북대 교수 김순권박사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시상식 자리뒤에는 뒤풀이 연회 준비가 되어있었다. 다른 종교 단체가 주관하는 시상식에 갔다가 쫄쫄굶고 온 쓰라린 기억이 있는 나는 연회시작되기 전에 참석자 문우 몇사람에게 일삼아 물어보았다.

"오늘 연회에 술이 나올것 같소, 안 나올것 같소?"

내 질문을 받은 문우들 대부분은 조계종에서 치르는 행사인 만큼 술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시상식 참석자 대부분은 불교계 인사였다. 시상식 직전에 불교신도들로 이루어진 부인네들 합창단의 찬불가 공양이 있었을 정도다.

내가 예상한대로 술이 나왔다. 나와야 마땅하다. 불교계가 고은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로마인들'풍속을 고려한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미국 미시건주의 주도(州都) 랜싱은, 인구가 25만명밖에 안되는 소도시다. 이 소도시에 사는 약 1천명의 한국인들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국어로 자동차 면허시험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기독교도의 집에는 재떨이가 없다.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수신자 부담으로 한국에 전화를 걸면호텔 교환수는 한국에 있는 수신자에게 수신 의사를 묻는데,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국어로 묻는다.

세계화가 우리 경제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믿는 사람이 많은데 천만에, 우리를 이 모양으로만든 것은 세계화의 흐름을 외면한 촌스러움이지 세계화 운동 그 자체가 아니다. 세계화는 보편화(universalization)다. '보편화'라는 말이 '우주(universe) '에서 파생했음에 유의해야 한다.세계화 보편화는 중앙 정부에서만, 서울 문화권에서만 주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바둑을 두지 못하지만 우리집에는 바둑판과 바둑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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