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신명여고의 전신

입력 1998-03-11 14:10:00

일제에 순종 거부… 애국·애족정신 전파

1907년10월에 개교, 올해 창학 91주년을 맞은 대구 신명여고의 전신 '신명여자중학교'(ShinmyungGirls Academy) 또는 신명여학교는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학문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근대 여성중등 교육의 요람이다.

구한말, 기독교문화와 신교육에 힘입은 신명의 딸들은 믿음과 사랑 그리고 봉사정신으로 이 고장의 무지를 일깨우는 선봉장이 되었음은 물론, 나라가 위태로운 일제 강점기에도 구국일선에 과감히 뛰어든 3·1만세 운동의 주역(여성의병운동에서 상술할 예정)이었다.

신명여중 또는 신명여학교라고 불렸던 신명걸즈아카데미의 개교는 제일교회와 직접 관련은 없다.제일교회 구내에서 개교했다거나 제일교회 목회자가 설립자가 됐던 사실도 물론 없었다.그러나 제일교회에서 설립한 신명여자소학교와 이름이 같고, 이 신명여자소학교(대남남자소학교와 함께 종로초등학교 전신)의 졸업생들이 진학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학교였다는 점에서 매우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재원씨(전 신명여고 교사·대구 동산병원 1백년사 편집 주간)는 말한다.하지만 그 뿌리는 엄연히 다르다고 덧붙인다.

뿌리를 더듬어보면 1901년에 대구스테이션(선교지부)의 처녀선교사인 새디 놀스양(Miss SadieNourse)이 선교부 구내에 있는 부인용 사랑에서 15세 미만의 소녀 14명을 모아 '월요오후반'(Monday Afternoon Class)을 조직했다.

월요오후반은 '소잉클래스'(sewing class·바느질반)라고도 불렀는데, 당시 여자들이란 바느질만가르쳐 시집보내면 그만이라던 통념이 지배하던 때라 소녀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신명여자소학교 초대교장을 맡았던 부마태(傅馬太=부르언목사 부인)가 1903년부터 혼자서 이 반을 맡아 소녀들의 글읽기·글쓰기·노래하기를 맡았다가 1905년에는 북장로회 대구선교지부에 부임한 칼슨양(Miss Carson)이 도왔다.

이 무렵, 도내 여러 소학교와 사숙에서 공부하던 많은 여학생들이 졸업하게 되자 이들을 상급학교로 진학시키는 일이 절실한 문제요 책임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구와 부산의 선교사들이 합동모임을 갖고, 이 문제를 논의하여 남자중학교 설립(계성학교, 1906년 개교)은 애덤스목사에게 분명히 위임했으나 여학교 설립은 부마태의 자유의사에 맡겼다.

부마태는 1907년 현 대구 동산동 소재 선교부 구내 '여자손님용 주택'에서 개인의 힘으로 신명여학교를 개교했다. 시골에서 옮겨다놓은 다섯칸짜리 일자 한옥 교사에서 임성례(林聖禮) 이금례(李今禮) 박연희(朴蓮姬) 등 제1회 입학생 12명과 초대교장 부마태, 조경로교감 등 20여명의 학교관계자가 모여 처녀수업을 했다. 그중에는 왜관 칠곡에서 온 지방학생들도 있었는데, 지방학생들은 꼭 기숙사생활을 하도록 했다.

가편집중인 '신명1백년사'에 따르면 대구부사에 신명여학교의 개교일이 1907년10월 15일로 돼있으나 증거할 문헌이 없으며, 10월15일은 대한정부의 교육령에 의하여 인가를 얻은 날짜이고 10월23일은 수업개시 날짜로 짐작된다고 적혀있다. 믿음(信)의 토대위에서 빛(明)을 발하라는 교명처럼 신명학교는 단순히 지식전수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유아교육학자 신연식씨(76·전 계명대교수, 29회졸)는 "푸른 초장처럼 꽃나무가 우거진 클로버 동산에서 천국처럼 아름다운 체험을 많이 했다"며 믿음속에서 친구들이 나라사랑 학교사랑에 푹 빠져들었다고 회고했다.

최고령 동문으로 신명 3·1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김학진씨(93·미 LA거주, 제10회졸)는 "신명학교의 교육이 신앙을 토대로하여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 애국 애족의 정신을 가슴깊이 심어주었다"고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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