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주의 철학에세이 (39)

입력 1998-02-25 14:13:00

시대의 우울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고만 느낌이다. 그것은 탄광촌의 분진처럼 도처에 스며있다.한때 천박한 웃음과 자황한 수다들에 염증을 느꼈던 우리는 가끔 우울의 깊이 혹은 그 낭만에 매료되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옛날 이야기다. 세상 모든 것을 온통 회색으로 칠해놓는이 '시대 정서'가 이제는 감당키 어려운 무게로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이럴때 내일은 완벽한 도피처처럼 보인다. '그래 희망없는 오늘은 죽은 듯 지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그런가. 내일에 희망을 걸고 오늘은 죽은 듯 지내도 되는 걸까. 우리 삶의 함정은 대개 이런 잘못된 환상들에서 생겨난다. 살아간다는 것이 오직 돈, 취업, 달러, 이자, 주가지수, 자동차, 쇼핑, 외식등만으로 이루어진다면야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기호도 유령도 천사도 아니다. 우리는 먼저 살과 뼈, 뛰는 심장과 흐르는 피를 가진 육체의 존재다.

인간은 육체의 존재

삶과 육체가 놓여질 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이다. 육체의 관점에서 보면 '내일'이라는 말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기만의 곤란한 점은 우리를 방심케 하여 오늘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데에 있다. 그 사이에 모든 것들은 아주 신속하게 지나가 버린다. 이렇게 스쳐버린 삶의 다채로운즐거움들을 내일 다시 찾을 수는 있을까. 돈은 은행에 저축해둘 수 있고 물건은 창고에 쌓아둘 수있지만 불행하게 시간은 어느 곳에도 모아둘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이말에는 신비한 통찰이 담겨 있다. 아니 두번만이랴, 수천 수백번도 더 담글 수 있지 않느냐고? 이것은 당치않는 반론이다. 물은 고여있고 내 발은 나무토막같이 무감감한 물체라면 그럴 수 있으리라. 그러나 물은 흐르고 내 발은 파닥거리는 감각들로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강물에 오직 한번 발을 담글 수 있을 뿐이다. 단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시각각 흘러드는 물처럼 새로운 삶을 우리는 팽팽히 긴장하는 자의식으로써 매순간 첨예하게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언젠가 미술관에서 알렉산더 칼더 전(展)을 함께 관람하고 나오던 친지가 '차이콥스키 선율 속의칼더, 어때 환상적이었지?'하는 말을 듣고 놀랐던 적이 있다. 차이코프스키? 나는 칼더의 난해한조각작품에서 의미를 찾고 상징을 해석해내느라 차이코프스키는 커녕 대체 어떤 선율이 내 귀에들렸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차이코프스키야 내 방에 와서 CD로 다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미술관에서 놓쳐버린 그 차이코프스키는 아니다. 어찌 차이코프스키뿐이겠는가. 모든 것이 그러하리라. 우리가정녕 역사의 흐름속에 있다면 무엇인가를 똑같이 반복할 수 있다는 믿음들은 하나같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똑같이 반복할 수는 없어

도대체 나는 지난 겨울을 기억할 수 없다. 그것이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갔는지를, 지난 겨울에도눈이 내렸고 바람은 불었던가. 크리스마스 캐롤이 거리마다 울려퍼졌으며 길모퉁이 찻집의 세작은내 몸을 훈훈하게 덮혀주었던가. 마치 나는 지갑을 날치기 당한 것처럼 한 계절을 통채로 뺏겨버린 기분이다.

그러나 오는 봄만은 그렇게 호락호락 뺏기지 않을 참이다. 올해사 말고 저렇게 꽃망울 터트리는봄꽃들을 외로히 홀로 피었다 시들게 하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나는 이 봄에 더 오래 따스한 햇빛속을 걸어다닐 생각이다. 그리고 불어오는 저 바람 안에 더 깊숙히 안기겠다. 나는 안다. 앞으로내가 얼마나 많은 날을 살게될지 몰라도 오늘의 태양을 두번 다시 볼 수는 없다는 것을.〈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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