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안네 프랑크를 기억하리라. '안네의 일기'의 주인공 말이다. 나는 그녀가 김유신, 이순신,알렉산더, 나폴레옹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녀의 위대성은 독일군이 점령해있는 네덜란드의 한 은신처에서도 꾸준히 일기를 썼다거나 탁월한 문장력을 구사했다거나 심성이천사처럼 착했다거나 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근년에 완간된 무삭제 '안네의 일기'를 읽어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것은 그 살벌한 조건속에서도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삶을 즐길줄 아는 여유로움에 있다. 1942년6월12일에서 1944년8월1일까지기록된 그녀의 일기장도 그녀가 열세살 되던 날의 생일 선물로 받은 체크 무늬 노트에 키티라는예쁜 이름을 붙여서 그것과 대화해나간 기록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두 주일동안이나 하루에 비스킷 같이 작은 마른 빵 한개와 몇잎 풀 푸성귀로 연명해야했던 상황에서 적은 1943년 4월27일의일기에서는 '다이어트를 원하는 분은 누구라도 내 우리 은신처로 오세요'라고 익살 떠는 대목이나오기도 한다.
그녀는 또 열 네다섯살 소녀답지 않게 섹스에 대해 강한 호기심과 남자 친구와의 첫 키스가 주는황홀감도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놀라게 되는 것 또한 그녀의 조숙함, 대담함, 솔직함등이 아니다. 수시로 벌어지는 독일 첩보대의 수색작전의 틈바구니에서도 기죽지 않고 그 제한된좁은 공간에서나마 체험 가능한 모든 삶의 영역에 자신을 남김없이 열어보이는, 무모해보이리만큼순수한 그 용기다. 마지막 일기를 쓴 사흘 뒤인 8월4일 은신처에서 나치의 비밀 경찰에 의해 죽음의 수용소로 압송된후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듬해 2월말까지 일곱달 동안, 그녀의 행적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겨져 있지않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까지 잠자리 날개의 투명한 빛남, 아침 이슬에 타는 풀포기의 아름다움, 찢어진 수용소 천장에서 들어오는한줌 햇살의 따스함에 감격하며, 그것을 사랑하는 일기장 키티에게 글로 속삭여주지 못하는 것을안타까워하며 죽어갔으리라는 것을.
그녀가 숨을 거둔 것은 연합국이 진격하여 수용자 전원을 그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구출하기 약한달전이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아직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까말까한 철부지 나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짧은 생애동안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육체의 감각, 모든영혼의 감수성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구석구석을 향유하였다. 그렇게 하여 얻은 다채로운 체험들을 벙어리 3년, 봉사 3년, 귀머거리 3년에 삼종지의의 굴레를 평생 지고 살아가며 60~70년의수를 누린 우리의 할머니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살다간 15년의 생애가 감히 짧다고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토벤의 생애'를 로망 롤랑을 좇아 내가 영웅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사람은 총칼로 위대했던 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위대했던 자다.
이 시대의 영웅을 생각해본다. 공자는 '날씨가 추워지고 나뭇잎사귀들이 다 떨어진 뒤에야 비로소소나무와 잣나무가 오래 푸르러 쉬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고 말했다.아닌게 아니라 이 IMF의 한파가 창졸지간에 덮쳐 우리의 어깨를 누르고 다리를 꺾어놓을 때야그들의 강함과 의연함을 우리가 뒤늦게 알게될 영웅들이 어딘가에는 있으리라. 아직은 우리 앞가림에 급급해 푸르름과 시듦이 함께 뒤섞여보이고 서있음과 넘어져 있음이 한데 엉켜보이지만 말이다.
〈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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