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남은 신라인들의 삶

입력 1998-02-10 14:13:00

흙으로 만든 인형, 토우(土偶).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처럼 스케일이 크고 웅장하진 않지만 점토로 빚은 이조그만 인형들 속엔 소박하고 진솔한 옛 사람들의 혼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은나라때부터 등장한 중국의 부장용 토우인 토용(土俑)이 권력자의 내세를 시중들 무사나 말, 시녀의 모습을 띠고 있다면 사람의 형상이나 동물, 각종 생활용구를 본떠 만든 우리 토우는 지배·피지배층의 일상 모습을 두루 갖춰 한층 서민적이다.

신석기시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나 선왕조시대 이집트에서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와가야시대부터 토우가 만들어졌지만 대표격은 역시 신라토우.

지난 6일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관장 강우방) 전시관.

지난해 12월23일부터 '신라 토우-신라인의 삶, 그 영원한 현재'전이 열리고 있는 이 곳엔 1천5백년전 신라인의 일상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토우들이 한자리에 가득하다.

주최측인 경주박물관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영남대·이화여대 박물관등 전국 10개 박물관이 소장한 토우 3백50여점을 오는 22일까지 일반에 공개중.

고대의 토우들은 5세기 무렵 주술적 의미를 담은 무덤(소형 석곽묘) 부장품의 일종으로 집중 제작된 것. 경주 일원의 각종 공사현장과 고분군, 궁궐터에서 발굴·보존돼오다 출토 70년만에 빛을보며 관람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미술책에서 흔히 보아온, 당시의 복식과 마구를 섬세하게 표현한 높이 23.5cm의 기마인물형 토기(국보 91호·경주 금령총 출토)를 비롯해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주검앞에서 슬퍼하는 여인(이 토우는 전시장에서 입체 비디오 영상으로 재현되고 있다)등이 눈길을 끈다.

지게에 항아리를 진 사람, 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람 등 인물상에서부터 고배(접시에 높은 굽을 붙인 그릇) 뚜껑이나 항아리에 장식으로 붙인 동물, 각종 생활도구 등 신라의 생생한 일상이 길이5cm 내외의 조그만 토우에 담겨 있다. 남녀의 성교장면을 묘사한 것마저 과장이 심해 해학미를느끼게 한다.

삶의 단면이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은 이들 토우 가운데는 동물을 소재로한 것도 많다. 가상의 동물인 용은 물론, 어찌된 일인지 당시 국내엔 서식하지 않았던 원숭이와개미핥기마저도 번듯이 한자리를 차지, 관람객을 잠시 아연하게 한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멧돼지, 짖는 개, 물고기, 노동력의 원천이었던 가축, 새등이 동물 토우의단골 소재. 서툰듯한 기법이지만 과감한 생략미와 여유로운 심성이 돋보인다.

가야시대 토우도 소량 전시돼 있으나 신라의 것에 비해 예술성이 뒤떨어지는데다 소재가 거의 동물에 한정되고 그 양도 많지 않다는 점에서 신라 토우에 비길 바가 못된다는 것이 박물관측의 설명.

토우는 사학과 고고학, 민속학, 복식사, 사회·종교사 등 인간을 둘러싼 거의 모든 분야의 연구에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미술사적으론 한국 조각사의 시원(始原)을 이루기도 한다.국립경주박물관 민병훈 학예연구관은 "문헌자료가 전하지 않는 시대의 출토 토우는 학제(學際)적연구를 통해 당시의 생활사와 한·일, 한·중 관계사 연구까지 가능하게 하는 귀중한 사료"라며그간 도외시돼온 토우 연구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경주 민속공예촌의 유효웅씨를 비롯, 경주엔 신라 토우 재현에 땀을 쏟는 이들도 5명 가량 있다.흙을 물반죽해 로울러로 갈아 잘게 부수고 발로 밟아 찰지게 한 뒤, 형태를 만들어 전통 가마에서고온 소성하면 '흙'이 '돌'로 변하며 토우가 탄생한다.

서양화가 전수천씨(51·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가 지난 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인특별상 수상작 역시 산업폐기물 위에 유리판을 놓고 그 위에 신라토우를 얹어놓은 '토우, 그 한국인의 정신'이다.

흙으로 빚은 옛 신라인의 삶은 회화와 설치·조각등 미술장르의 다양한 소재로, 또는 상품으로 그활용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신라인의 종교관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토우. 작고 투박하지만, 땅속에서 솟아난 신라인의 정열이살아숨쉬는 우리 마음의 문화유산이자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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