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3)

입력 1998-01-16 14:00:00

남일동 폐물폐지 부인회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운동이 한창이던 1898년 9월. 마침내 여성들의 자각에 의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贊襄會)가 조직되었다.

이 회가 여성에게 동등한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하였다면 1907년 2월23일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에 의하여 개시, 전국적으로 점화된 여성국채보상운동은 선각적 남성에 의하여 계도되었던 여성운동을 비로소 여성각성에 의한 여성운동으로 발전시킨 역량을 지닌다.

1907년 2월21일 석달간 금연과 현금 모금을 주창한 대구 북후정의 국채보상을 위한 시민대회. 이대회에는 많은 부녀자들도 참석하였다. 그런데 참석한 대구의 부녀자들은 남자의 참여만을 전제로한 것이나 다름없는 취지문에 크게 격분, 이틀뒤에 대구 남일동에서 7인의 가정주부들이 모여 '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止婦人會)를 조직하고 '경고아부인동포라'는 격문을 전국 여성들에게 보내본격적인 여성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이끌어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부인은 물론(勿論=논 외로 침)한다하니 대저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이 회에서 제의한 여성의 국채보상방법은 여자가 소지한 패물을 헌납하자는 것이다. 환금성이 높은 패물로서 국채상환을 하자는 것은 남성들이 3개월간의 단연을 결의한 방법보다 훨씬 효과적인방법이 아닐수 없다. 일부 여성들은 부인의 패물로 당시 국채 1천3백만원을 훨씬 능가하는 3천만원을 수합할 수 있어 부인의 독자적 힘으로 능히 국채를 보상하고도 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했다.

이 회의 격문은 전국 여성의 즉각적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경향 각지에서 부녀자만으로 조직된국채보상단체가 조직돼 부녀들이 이에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이 운동을 거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 역할을 하였다.

지방과 서울의 부인회가 연결되고, 모금운동이 펼쳐지면서 신분계층을 막론하고 누구나 돈을 내기만 하면 국채보상부인회원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모금은 가가호호 방문을 통해 독려하거나 즉석에서 현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이 예정액만을 기록하고 차후에 헌금하도록 하였다.또 어떤 지역의 기독교부인들은 쌀을 조석으로 한 숟가락씩 아끼는 성미를 모아 보내는 '국미적성회'를 결성, 수일만에 무려 5백명의 참여를 끌어냈으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량을 줄이고 반찬값3~4푼을 절약해서 나라에 바치는 방법도 모색됐다. 또 물좋기로 유명한 북청 강계에서는 부인들이물을 직접 길어서 물지게꾼에게 지불할 돈을 절약해서 바치는 '부인급수보상회'도 조직되었다.대구 서문밖 수창사(壽昌社)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는 여성의 참여가 국민적 단합을 촉진시켰다고평가하는 공문서를 남겼고, 이후 남자에 의하여 조직되는 국채보상단체의 취지문에는 으레 여성들의 의거를 격찬하고 또 여성들이 보다 광범위하게 참여할 것을 호소.권유하고 있다. 또 각 신문에서도 국채보상금을 의연하는 여성들의 장거들을 특별히 게재, 프레스 캠페인으로 이 운동을 더 한층 고무하였다.

여성들의 의병활동 이전에 애국의식을 꽃피우는 계기를 마련한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조직은 일제의 경제적인 침략과 지배에서 국권을 지키기 위해 전국 각 지역에서 빈부귀천을 뛰어넘은 모든 계층의 여성들이 호응을 끌어냈고, 대구가 여성운동의 빛나는 전통을 지닌 도시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일부 신문 자료를 제외한 당시 사료의 멸실로 인한 학계의 정리작업 미비와 여성계의 관심 부족, 후손찾기 노력의 결여 등의 원인이 복합 작용, 개화기우리나라 여성들의 눈을 가정에서 민족과 국가로 눈뜨게 한 여성국채보상운동에 대한 평가작업이미흡하기 짝이 없다.

전국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여성은 1천8백21명으로 양반및 유지부인층이 전체의 58.62%%,부실(副室=첩)이 13.74%%, 기독교여성 13.79%%, 기생및 주희 10.34%%, 신여성 3.44%%를 차지한다.

"이러한 여성들의 구국운동에의 참여현상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봉건신민적 행위의 발로로서만평가할 수 없다"는 여성학자 이효재씨(전 이화여대교수)는 "그들의 국가체제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왕권중심이었다하더라도 사람으로서 동등한 책임과 역할을 인식한 입장에서 더욱 적극적으로참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교수는 이념의 차원이 아니며 구체적 실천방법이 제시됨으로써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다 참여하여 민족운동의 연대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고 내다본다.사학자 박용옥씨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후 프랑스 국민회의에서 반포한 '인권선언'(人權宣言)중에 여성의 인권이 포함돼있지 않은 것에 격분하여 여성운동가 꾸지(de Gouge, Olympus)가 '여권선언'(女權宣言)을 발표함으로써 서구여성운동이 개화된 것처럼 1907년에 한국의 여성구국운동이여성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한국근대여성운동사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한다.

그는 "대구에서 발발, 전국적으로 번진 여성국채보상운동은 거족적 차원에서 정치문제 해결에 여성이 참여함으로써 남녀평등권을 찾아보려는 노력이었다"며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여성능력을 역사적인 국난극복운동에서 과시함으로써 전통적인 그릇된 남녀차별관을 타파하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남녀동등권 획득의 획기적 중요성을 지닌다고 마무리했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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