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매일신춘문예-거북바위의 꿈

입력 1998-01-06 14:10:00

강물이 흐르다 은빛으로 곱게 부서지는 작은 여물목이었지, 내가 살던 곳은.

갯내음이 희미하게 풍겨 오는 걸로 보아 바다가 그리 멀진 않았을 거야. 그래서였던지 내 주위엔하얀 모래나 조그마한 자갈들 뿐이었어.

그곳에 나 혼자 달랑 자리잡게 된 까닭을 난 기억할 수 없어. 아마 큰 홍수가 났을때 계곡에서 굴러 내려왔을 거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그렇다면 다른 친구들도 더러 있어야 하잖아?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어쨌든 무릎 근처 생채기에 깃들어 사는 피라미들도 여럿 있었고, 이따금 각시붕어나 참종개 같은물고기들과 하얀 물총새가 놀러와서 야단스럽게 수다를 떨곤 했지만, 그래도 난 가끔 외롭다는 생각을 했어.

물위로 드러난 가슴이 항상 서늘했거든? 강바람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야.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저녁의 일이었지. 여울 윗목에 비친 조각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조각달의 모습이 살랑살랑 이그러지는 거야. 바람이 밟고 가는 것이라고 보기엔 흔들림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어.

고개를 들어보았지.

"참방 참방……"

그제야 물살 헤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한 아이가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어.'누굴까?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강둑 너머에 꽤나 큰 마을이 있어도 평소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옛날엔 소를 몰고 건너는 농부 아저씨들이랑 빨랫감을 가져온 아주머니들, 그리고 멱을 감고 피라미를 쫓아다니던 꼬마들도 더러 있었지.

사람들은 옛날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저녁에 어린아이가 혼자서 찾아오다니……. 그 순간, 나는 내 가슴이 가볍게 팔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그 아이가 내 등에 올라앉아 강물에 발을 담그고 물살을 해작거릴 때 막 잠이 들려던 피라미들은깜짝 놀라 아우성이었지만, 내 가슴은 더없이 따뜻하게 부풀었어.

그 아이는 아무말 없이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돌아갔어. 딱 한번, 입을 다문채 콧소리로 띄엄띄엄 무슨 노래를 웅얼거렸을 뿐.

그 아이가 돌아가고 난 후에도 나는 내 등에 남아있는 그 아이의 체온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었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아이의 이름은 현석이었고 현석이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거야.다음날 아침,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눈을 뜬 나는 마을로 난 작은 둑길을 바라보았지. 물안개 때문에 길은 보이지 않았고 그 길가에 선 키다리 미루나무들만 희미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어.그러나 그날 따라 내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고 키가 서너 뼘은 더 커진 것 같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자박자박 스며 나오는 설렘을 나는 그렇게 느꼈던 거야.

강둑의 미루나무 그림자가 물살에 머리를 적시고, 빨갛게 익은 햇살이 여울에 내려와 보석처럼 반짝일 무렵이었어.

강둑에 흐드러진 달맞이꽃들도 노란 꽃초롱을 켜들고 있었지.

현석이는 그제야 달맞이꽃을 헤치며 강둑을 내려오는 거야. 그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그래서 현석이가 물가에서 물수제비를 뜰때, 물위를 스쳐 나아가는 돌멩이가 겨우 세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꼬르륵 잠기곤 했지만, 나는 그걸 무척 재미있고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었어.그날 현석이는 꽤나 오랫동안 하모니카를 불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놀다가 갔지. 그래서나도 현석이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

뭐라고 말하진 않아도 현석이의 표정, 눈빛, 그리고 현석이가 몇번이고 되돌려 불던 하모니카 소리와 웅얼거리던 노래말 속에서 나는 어렴풋이, 그러나 틀림없을 현석이의 슬픔과 외로움을 느낄수 있었던 거야.

현석이의 노래와 하모니카소리는 마치 간절한 기도와 같았거든?

물론, 훨씬 지난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의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던 거야.그 후로도 얼마동안, 해거름녘이면 현석이는 강둑의 노란 달맞이꽃을 헤치며 내게로 왔지.그 날처럼 물살을 해작거리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가끔은 어기적어기적 물살을 거슬러 다릿목까지 갔다 오곤 했는데 어떤 날은 물속에 비친 달님을움켜잡기라도 하려는 듯이 두 손으로 거푸 물장구를 치기도 했지.

그 모습을 먼발치로 바라보던 내 마음은 현석이의 발걸음보다 더 힘겨웠어.

그러던 어느날, 긴 여름도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이었어.

그날따라 한참 동안이나 무릎을 곧추세운 채 얼굴을 묻고 있던 현석이가 갑자기 내게 말을 거는거야.

"거북아"

"……"

처음엔 나를 부르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현석이가 거듭

"거북아, 거북바위야……"

라고 부르는 게 아니겠어?

난 그때 얼마나 기쁘고 놀랍던지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했지. 더구나 거북바위라고 내 이름까지지어 놓았던 거야. 얼마나 멋진 이름이니? 그래서 난 대답조차 할 수 없었지.

"넌 아마 내 얘기……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을 거야"

"……"

그러나 현석이가 내 이름을 지어 부르며 말을 걸어 주었다는 기쁨도 잠시뿐, 나는 현석이의 심상치 않은 말투에 이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수밖에.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지 몰라. 잠깐인 것 같기도 한데 그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거든."……아빠와 엄마가 크게 다투셨단다. ……어른들도 곧잘 다투지. 그런데 하루는 더 심하게 다투신 거야. 그리고는 헤어지고 말았어. ……너, 헤어진다는 거, 그게 뭔지 아니? 그건 나와 내 동생을 가장 슬프게 하는 거야. ……"

"……"

"넌 언제나 여기서 떠나지 않으니까 아마도 헤어진다는 걸 모를 거야. 뭐,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난 할머니 집에 오게 되었어. 아빠가 그랬지. 방학 동안만이라도 할머니 집에 가 있으라고. 곧 더 예쁜 새 엄마를 맞을수 있을 거라고. 그건 정말 정말 나쁜 말이야"

그렇게 시작된 현석이의 얘기는 더러 강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때마침 울어대던 천둥소리에 묻히기도 했지만 난 다 알아들을 수 있었어. 아니, 다 느낄 수 있었던 거지.

하여튼 그날 저녁 현석이의 얘기는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아람이라는 예쁜 여동생은 엄마와 함께살게 되었다고, 자기는 엄마보다 동생이 더 보고 싶다고, 엄마도 아빠도 다 밉다고, 한번은 동생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그 편지에 적힌 얘기보다 글자 위의 얼룩이 마음에 더 남았다고….그런데 끝까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딱 하나 있었지.

그건 바로 현석이의 아빠와 엄마가 다투시게 된 이유야.

현석이는 몇 번이고 말을 끊으며 띄엄띄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얘기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애. 설마하니 어른들이 그런 이유로 헤어지기까지야 하겠어?어쩜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야.

아! 나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긴 어려워.

간단히 얘기하자면, 현석이네는 어느 조그만 도시에서 살고 있었대. 그런데 회사에 다니시던 현석이 아빠가 갑자기 직장을 잃게 되었나봐. 그 날부터 현석이 아빠는 자주 술을 드셨고 그래서 엄마와 말다툼이 잦아지게 되었다는 거야.

하루는 다투는 중에 현석이 엄마가, 당신은…남들처럼…변변히…. 뭐, 그렇게 얘기했다는데 그 말을 들은 현석이 아빠는 그만 집을 나갔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며 들어오셨대.

없었지만 현석이는 다 알 수 있었다는 거야.

현석이는 그 말을 나보다도 훨씬 더 어렵게 어렵게 이어갔어. 그리고는 굉장히 일그러진 표정으로이건 비밀이야, 라고 거듭 다짐을 주었던 거지.

그런데 현석이의 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산너머에서 으르렁거리던 천둥소기가 그 때쯤 해서 세찬 소나기를 마구 뿌려대기 시작했던 거야.

그런데도 현석이는 돌아갈 생각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 그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겠어?'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그 노래는 몇 번이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곤 했지만 현석이는 결국 끝까지 다 부르고 또다시,또 다시 불렀던 거야.

그때, 나는 내 몸을 때리던 차가운 것이 빗방울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다행히 빗방울은 금방 멈추었고 마침 강둑에서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현석이의 어깨를꼬옥 감싸안았지.

난 그 사람이 누군지 금방 알수 있었어.

'현석아, 이제 돌아가자. 내일은 올라가야지. 방학도 다 되었잖아'

'……'

현석이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현석이가 딛고 섰던 내 왼쪽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는 걸 난 흐뭇하게 느낄 수 있었지.

그리고 현석이와 아빠가 새끼손가락을 걸때 내 마음도 그 손가락 사이에 살짝 끼워 넣었지.그날 이후로 난 현석이를 다시 볼수 없었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현석이를 위해선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그 날의 약속처럼 현석이는 다시 엄마와 동생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그게 몹시 궁금하기도 했는데 아마 그럴 거라고 믿고 바랄 수 밖에.

현석이가 나중에 다시 나를 찾아왔을지도 몰라.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혼자서가 아니고 온 가족이.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동생 아람이와 함께.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나도 그 강을 떠나게 되었어. 어느날 몇 명의 사내들이 커다란 포크레인과 트럭을 몰고 와서는 나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쳤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바로 여기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거야.

가슴엔 '공원식당'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었고.

내가 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지 이젠 알겠지?

현식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평화로운 그 강이 너무나 그리운 거야. 수다쟁이 피라미들도, 이웃처럼 드나들던 각시붕어며 참종개들, 그리고 가끔씩 날아와선 세상 얘기를 들려주던 멋쟁이 물총새도…. 하물며 항상 서늘하게 가슴을 적시던, 그래서 조금은 미워하기도 했던 강바람과 물안개까지도.

그래서 늘 현석이를 기억하는 거야. 가끔은 나도 모르게 현석이가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지.그럴 때면 나는 엉뚱한 꿈을 꾸곤 해.

그 강에서, 눈 감아도 훤히 보이는 그 금빛 여울에서, 현석이네 가족과 내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거야. 그래서 현석이네 가족을 모두 등에 태우는 거야. 꽤나 무겁겠지? 하지만 아무리 무거워도참을 수 있을 것 같애. 현식이와 아람이가 신이 나서 콩콩 뛰어도 아프지 않을 거야.그리고는 이야기 속의 거북이처럼, 사나흘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거야. 피라미와 각시붕어와참종개들도 꼬리치며 따라 올거야.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흔들며 강을 거슬러 거슬러 오르는 거야. 아무리 거센 물살이라도 가뿐히헤칠 수 있겠지?

그건, 무척 즐거운 여행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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