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주의 철학에세이(32)

입력 1997-12-24 14:18:00

오늘 아침 받아든 한통의 우편물이 내 심사를 헝클어놓고 있다. 망년회 취소통지서였다. 재부 고향 친목 회장이 보내온 것이다. 경제한파를 고려하여 임원회에서 취소하기로 결정되어 인사로 대신한다는 것이다. 눈물이 솟도록 아쉽고 서운하기만 하다. 평소에는 이런저런 일로 빠질 수밖에없지만 망년회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쓰고 참석해서 그 주름들마저 정겨운 얼굴들 만나 회포푸는 것을 내 중요한 연례행사로 삼아온 터였다. 부부동반에 노부모까지 모시고 오는 이 망년회는흡사 시골잔치를 방불케한다.

아아 이 아름다운 풍속이 이토록 속절없이 사라져야 하나. 물론 나는 호텔에서 베풀어지는 호화망년회는 지독히 혐오하는 사람이다. 품위있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고상한 언어를 주고받으며 철갑상어요리에 엑스오급 위스키를 배부른 애 젖빨듯이 빨아대는 그런 망년회를 나는 견디지 못한다.그러나 적조했던 친지들이 저무는 한해를 핑계삼아 모여서 만나지 못한채 흘러보내버린 세월들을이야기하고 다가오는 한해의 덕담을 가가대소하며 나누는 자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이런 자리마저 검약과 절제라는 당국의 시책에 따른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사라져가게 놔두어야하나.

삶은 이미 시작된 현재

제자 자공이 매월 초하루 삭망에 양을 잡아서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예를 허례허식이라고 하며 없애려 하자 공자가 말린다.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느냐? 나는 그 예를 아까워한다'(爾愛其羊, 我愛其禮)여기서 공자는 눈에 보이는 양 한마리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봉의 위력에 미치지 못하는 제자의 짧은 생각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생각은 분명한 것이니 그 한마리의 양을 아끼기 위해 우리가 지켜온 그 예의 아름다움을, 제사의 신성함을, 축제의 흥겨움을 몽땅 내다버려야하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공자에게 세월 모르는 사치스러운 인간이라는 비난을 퍼부을수 있겠는가.

혹시 우리가 너무 필요이상으로 움츠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한양가는 촌놈 이천서부터 긴다더니 이건 주눅들어도 너무 드는 것 아닌가. 지금은 숨죽이고 보내다가 언젠가 좋은 세월이 오면 신명나게 살아보자고? 그러나 진정 시작될 좋은 세월은 언제부터이며 그 진짜의 삶이란 어떤 것이냐.우리를 환상의 삶 속으로 몰아놓는 열패감을 경계하자. 삶은 백미터 경주처럼 시작하는 출발선이따로 있는 게임이 아니다. 삶은 언제나 이미 시작된 현재이고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아직도 이어지는 현재일 뿐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재를 사랑하지 않고서도 추억을, 꿈을 가질 수 있다는믿음은 순전한 도피요 자기기만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희랍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화자인 '나'와 조르바는 갈탄과 목재를 산에서 항구까지 직접 실어나르는 케이블 설비에 모든 자본을 투자한다. 그러나 케이블의 첫 시운전에서 모든 철탑들과 모든 시설물들이 산산조각으로 무너져내리고 만다. 경사면 측정이 잘못되어설계착오를 범한 것이다. 모든 마을사람들과 인부들이 동정과 경멸의 언어를 한마디식 던지고 도망치듯이 사라져버린 빈 모래사장 위에서 '나'와 조르바는 통한의 눈물을 뿌리는 대신 신명에 젖은 춤을 밤이슬이 내리도록 추어댄다. 이들은 너무도 슬픈 나머지 돌아버려서 그런 것인가. 이 춤으로써 조르바가 보여주려했던 것은 '희랍인은 패배할 수 있으나 파멸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축제의 잔을 들자

어찌 희랍인만이겠는가. 인간이 본래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다시 승리할 수있다는 것. 우리가 아직 서로 사랑할 시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어개를 펴자. 살아있음의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자. 어쨌든 지금은 축제의 시간이다. 내 골치 아픈언어들마저 깡그리 쓸어내고 오늘 저녁만이라도 질펀한 마음으로 축제의 잔을 높이들자.〈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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