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정치인으로 40년 외길을 걸어온 한국 현대정치사의 거목(巨木)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후보가 한민족의 새로운 밀레니엄을 열 대통령으로 정상에 우뚝 섰다.
암울했던 유신시절과 서슬 퍼런 신군부의 철권통치에 온몸으로 저항, '민주화의 화신'으로 평가받아온 김당선자는 이로써 72년부터 닻을 올린 파란많은 비운의 대권도전사에 종지부를 찍고, 세기(世紀)를 잇는 한국 대통령사의 첫 페이지를 열게 됐다.
하의도 섬소년에서 북악의 주인이 된 그는 70성상을 헤쳐온 경륜과 철학, 지혜와 용기, 사랑과 믿음으로 위기에 처한 한민족을 통일과 번영의 21세기로 이끌고 나가야 할 대임을 맡게 된 것이다.그는 지금까지 11차례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는 등 세계적인 민주·인권지도자로 명성을 날려왔다.
이번 대선 승리로 그는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필리핀의 코라손아키노 등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세계적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민주화 노력에 대한 국민적 평가를 받은 셈이다.
그의 40년 정치역정은 영욕과 부침, 환희와 좌절이 교차한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유신의 장막이 드리워진 72년부터 6·29선언이 나온 87년까지는 납치, 망명, 투옥, 연금으로 점철된 말그대로 형극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꺼질 듯하면서 다시 살아오르는 촛불처럼 불꽃같은 생명력을 유지해 온 한국판 '부동옹(不到翁)'이었고, 모진 풍상을 이겨내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인동(忍冬)'과도 같았다.그는 목포 앞바다에 솟아있는 섬, 하의도에서 일본인 지주의 땅을 소작하던 김운식(金雲植)과 장수금(張守錦)의 4남1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락 김씨 74대손이다. 호적상 25년12월3일생이다.그는 해방공간에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게되자 환멸을 느끼고 탈퇴했다. 그러나 이때 건준에 몸을 담았던것이 그에게 평생 '색깔론'의 꼬리표가 따라붙게 한 뼈아픈 이력이 됐다.
그는 한국전쟁중 우익반동이라는 이유로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됐다가 총살직전에 탈옥, 생애 5번의 죽을 고비중 첫번째 고비를 극적으로 넘겼다.
김당선자의 초기 정치역정은 3전4기만에 성공한 그의 대권도전사와 닮은꼴이다.사업으로 꽤 돈을벌어들여 여유가 생긴 그는 정치쪽으로 눈을 돌려, 54년 목포에서 민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첫 실패를 맛본다.
그는 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거푸 고배를 마신뒤 4·19혁명으로다시 치러진 61년 5월 인제보선에서 생애 첫 금배지를 달았다.
5·16이후 군정기간에도 3차례나 투옥됐던 그는 63년 6대 총선에서, 나중에 그의정치적 본산이 된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된 이후 발군의 지략과 달변으로 중견정치인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특히 64년 김준연(金俊淵)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때는 무려 5시간19분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않고필리버스터(의사진행지연작전)를 거뜬히 해내는 기염을 토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67년 7대 총선에 당선된 그는 68년 5월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 김영삼(金泳三)씨와의 첫대결인원내총무경선에서 패한다. 신민당 유진오(兪鎭午)총재는 세차례나 총무를 역임한 김영삼대신 김대중의원을 총무로 지명했으나, 김대중의원은 인준을 받는데 실패한것이다.
그러나 실패는 약이 됐다. 그는 70년 김영삼 이철승(李哲承)씨와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뒤늦게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경선에 합류, 1차 투표에서 3백82표를 얻는데 그쳐 김영삼후보에게 뒤졌으나, 2차투표에서 이철승씨의 도움을 받아 4백58대 4백21표로 YS를 누르고 대역전을 엮어냈다.그는 71년 제1야당 신민당 대선후보로 정책대결을 시도, 바람을 일으켰으나 박정희(朴正熙)후보에게 95만표차로 석패했다. 당시 그는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졌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선전, 거물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10·26'사건으로 박정희대통령이 피살된 뒤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한 그는 '5·17'사태를 주도한전두환(全斗煥)장군의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그는 국제여론과 미국정부의 압력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돼 죽음의그림자에서 또 한번 벗어났다. 그러나 그는 타의에 의해 82년말 미국으로 건너가 2년2개월동안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미국체류중 그는 국내에 있던 김영삼씨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으며, 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 신민당 압승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후 그의 계속된 민주화운동은 6월항쟁을 촉발시켰고,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씨와 함께 이민우(李敏雨)씨의 신민당을 깨고 나온 그는 통일민주당을창당했으나 양김(兩金)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다.
그러나 당시 재야의 비판적 지지를 업고 대선에 출마한 그는 노태우(盧泰愚) 김영삼후보에 이어 3등으로 밀려나, 대권재수에 실패하고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는 91년 9월 '꼬마민주당'의 이기택씨와 야권통합을 성사시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92년 '3·24'총선에서 의석 97석을 차지, 대권도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14대 대선에 3번째 도전장을 낸 그는 김영삼후보에게 져 대권3수에 실패하고 만다. 그는 개표가완전히 마감되기도 전 성명을 발표, "오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다"고 선언한 뒤 정치무대에서 내려와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95년 지자체선거에서 조순(趙淳)서울시장후보의 연설원으로 등록, 유세를 돕는것을 계기로정치일선에 재등장한뒤 세인의 예상을 깨고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정국이 엉망인데 야당이 제구실을 못한다'는 게 복귀의 명분.
또 그 해 9월5일에는 같은 이유로 이기택(李基澤)총재의 민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제1야당 총재로 정계전면에 공식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96년 4·11총선에서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치고 내각제 개헌저지선인 1백석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 79석을 얻는데 그쳐 당내외로부터 야권분열의 책임자라는 비난과 함께'DJ 대통령 불가론'의 역풍에 시달려야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그는 15대 국회개원과 함께 이념적 좌표가 다른 자민련 김종필(金鍾泌)총재와 손잡고 양당공조체제를 구축, 15대 총선을 총체적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하면서 당내 이상기류를 잠재우고 당장악력을 복원함으로써 '정치 9단'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자민련과의 공조를 발전시켜 대선승리를 위한 'DJP(김대중-김종필)'단일화에 이어 무소속박태준(朴泰俊)의원과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까지 가세시켜, 명실공히 야권단일후보로 생애 4번째대권 출사표를 던져 대선의 최종 승자가 됨으로써 '김대중(金大中)시대'의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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