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대선 3당후보 생애와 정치 역정

입력 1997-11-26 15:14:00

'12·18대선'은 후보등록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국민신당 이인제(李仁濟)후보등 3인 구도로 압축되고 있다. 김대중 이회창후보가 선두를 놓고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이인제후보가 뒤따르는 '2강1중'의 판세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세 후보의 생애와 면모를 살펴본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는 대법관, 국무총리, 집권당 총재 등 3부 요직을 두루 거쳐 국가를통솔하는 대통령직에 도전하고 있다.

96년 4·11 총선을 앞두고 정계에 입문한 이후보는 정치신인임에도 불구, 집권당 사상 초유의 당내경선에서 당내 뿌리가 깊은 기성정치인들을 제치고 여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됐다.하지만 아들 병역면제 파동, 당내 분란 등으로 한동안 지지율이 3위로 곤두박질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결국 민주당 조순(趙淳)총재와의 합당을 디딤돌로 후보등록일을 앞두고 국민적 지지도를다시 회복, 유력한 후보로 발돋움했다.

이후보는 1935년 6월2일 황해도 서흥에서 부친 이홍규(李弘圭·93)옹과 모친 김사순(金四純·86)여사의 4남1녀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황해도지만 집안이 16대 조부때부터 충남 예산에서 살아 고향은 충청도이다.

광주 서석 초등학교, 경기중, 경기고를 거쳐 서울법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 4학년때인 56년 고시사법과에 합격, 공군법무관으로 3년간 복무한후 대위로 제대했다. 그리고 4·19 혁명이 일어나기직전인 60년3월 서울지법 인천지원 판사로 임명됐다.

초임 판사시절인 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해 7월 혁명재판소 재판관으로 차출됐다. 이후보는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서울지법 판사중 연소자순으로 뽑았기때문에 나이가 어려 차출됐다"고 회고하고 있다.

81년 46세의 나이로 최연소 대법원 판사에 임명된 이후보는 대법원에 근무하는동안 '소수의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쪽'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것도 대법원판사시절 소수의견을 많이 낸데서연유했다.

이후보는 88년 6공 출범초 만들어진 민주화합추진위(민화위)에 재야법조인 자격으로 참여해 민주발전분과위에서 활동했고, 그해에 대법관으로 임명되면서 중앙선관위 위원장을 맡았다.중앙선관위원장 재임시절 동해, 영등포을 보궐선거의 불법타락을 막기 위해 후보와 정당지도자들에게 경고, 고발조처까지 하는 단호한 면모를 보였고, 불법선거를 제대로 막지 못한데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며 위원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중앙선관위원장을 거치면서 그의 이름 석자는 대중속에 각인됐고, 그후 문민정부 출범이후 감사원장으로서 성역없는 사정으로 문민정부 초기 개혁사정을 진두지휘하며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기시작한다.

그후 93년 12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에 임명됐으나 총리의 내각총괄과 정책조정의 역할을 제고하는데 주력하다 김대통령과의 갈등으로 1백27일만에 총리직을 내던졌다.이후보는 김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을 계기로 '대쪽총리'라는 별명을 얻으며 국민적 인기를 얻었고, 이번 대선전에서도 김대통령과의 차별화를 기반으로 추락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선배 법관의 소개로 만난 부인 한인옥(韓仁玉·59)씨와 지난 62년 결혼, 2남1녀를 두고 있다. 한성수(韓成洙)전대법관의 딸로 경기여고,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한씨는 '영부인 후보' 지지도 1위를 기록하는 등 탄탄한 내조로 이후보에 적지 않은 힘이 됐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후보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정치사의 한 기둥을이뤄온 인물로, 26일 대선후보 등록으로 생애 통산 4번째 대권도전에 나서게 됐다.김후보는 40년가까운 정치생활동안 10개 야당을 거치면서 국회의원에 6차례 당선하고 3차례 낙선했으며, 특히 71년 87년 92년 등 3차례 대선에서 모두 패배하는등 자신의 저서 표현대로 '인동초'의 세월을 보냈다.

김후보는 그러나 마지막 도전이 될 이번 15대 대선을 앞두고 지난 3개월여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도 1위를 유지, 역대 어느 때보다도 당선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호적상 1925년생(만72세)인 그는 54년 정계에 투신, 국회의사당의 문을 두드렸으나 3차례 거푸 좌절을 맛본 뒤 61년 제5대 강원도 인제의 5·13 보궐선거에서 생애첫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당선 사흘만에 5·16쿠데타가 발생, 의원선서도 하지 못한채 의원직을 상실했다.이후 자신의 정치적 본산이 된 전남 목포에서 6대와 7대 총선에서 연달아 당선한데 이어 8대 총선에서는 전국구로 의회에 진출, 중견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김후보가 오늘의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한 계기는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전.그는 당시 김영삼씨와 함께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결선투표까지 가는 불꽃튀는 경쟁을 벌여 초반열세를 뒤집고 대역전승에 성공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71년 박정희(朴正熙)후보에 도전했지만 95만표차이로 석패, 거듭되는'대권도전사'의 첫 장을 열었다.

김후보는 이후 동경납치사건 등 유신이래 5년반동안의 투옥, 3년여의 망명, 6년반의 가택연금, 신군부에 의한 사형선고 등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어두운 정치의 뒤안길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그런 와중에도 김후보는 미국에 망명해있던 84년 국내의 김영삼씨와 함께 민추협(民推協)을 결성했으며, 이듬해 국내로 돌아와 2·12총선에서 '신당돌풍'을 이끌면서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씨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급조, 재야의 비판적 지지를 업고 대선에 출마했다가 노태우(盧泰愚) 김영삼후보에 밀려 3등을 기록함으로써 대권실패이력을 보태고 말았다.

김후보는 91년9월 '꼬마민주당'의 이기택(李基澤)씨와 야권통합을 성사시킨데 이어 3·24총선에서여소야대를 실현한 뒤 92년 3번째 대권고지 등정에 나섰지만 김영삼후보에게 패퇴, 정계은퇴를선언하고 야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종지부가 찍힌 듯 했던 그의 대권도전사는 93년7월 영국에서의 '은둔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뒤95년 9월 국민회의 창당을 계기로 새롭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김후보는 지난해 4·11총선에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한뒤 대권승리를 위해 자민련 김종필(金鍾泌)총재와의 연대를 지속적으로 추진, 지난 10월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자신으로의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박태준(朴泰俊)의원과 국민통합추진회의 일부인사들을 끌어들이는데도 성공했다.김후보는 초유의 정치적 실험인 정당간 연립정권을 약조로 정당간 대선후보단일화를 이룸으로써기대치를 높인채, 마지막 도전이 될 15대 대선에서 국민적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李仁濟)후보는 신한국당 경선 돌풍과 경선불복및 독자출마를 선언하는 과정을밟으며 단기간에 일약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지사 재직시인 지난 95년 10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깜짝 놀랄만한 젊은 후보'를 언급함으로써, 나라 안팎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李)후보는 이후 주위의 만류에도 경선에 일찌감치 참여,정치인으로서 명운을 건 도전장을 던졌다.

경선과정, 특히 TV 토론회와 합동연설회가 '이인제를 위한 자리'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후보는젊고 당당한 모습과 뛰어난 언변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이 돌풍은 경선 마지막까지 이어져, 이한동(李漢東)고문을 근소한 차이로 물리치고 결선에 진출하는 '개가'로 이어졌다.이후 이후보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는 대신 '세대교체'와 '국민의 선택권 보장'등 '국민의 부름'을내세워 대선출마를 선언, 논란을 야기했다.

이후보가 처음 국민 관심권으로 진입한 것은 지난 88년의 국회 광주 청문회. 집요한 질문공세와재치로 '똑똑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 이후 탄탄한 정치역정을 밟는 뒷받침이 됐다.또 야당바람이 거셌던 지난 95년 지방선거에서 1백30만표를 얻어 경기지사에 당선, 정치인으로서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보는 5공(共)말기 민주화 항쟁의 파고가 높았던 87년 후반기 법복을 벗고 김대통령이 주도하대전지법 판사를 지낸뒤 변호사로 일하다 87년 9월 경복고 선배인 김덕룡(金德龍)의원의 소개로김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충남 논산 출신으로 13대총선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로 경기 안양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첫 정치적 시험대를 무난히 통과했고, 문민정부 들어서는 45세의 나이로 노동부장관을 맡았다.이후보는 자신의 출마에 대해 "빠른 변화와 결단이 요구되는 시대에는 젊은 세대에서 지도자가나와야 하며,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지도자가 선택돼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른바'젊은 대통령, 일꾼 대통령론'이다.

그러나 이후보는 지난 9월13일 대선출마를 선언한 이후 끊임없이 도덕성 시비에 시달려왔다. 경선결과 승복이라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훼손한데 대한 비판적 여론이 적지않게 제기됐기때문이다.

이후보는 김대통령을 '정치적인 아버지'라고 밝혀온 점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김대통령 신당지원설'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YS 신당지원설'이후 '반 YS' 유권자층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여론조사결과 지지율 하락의 요인이 됐다.

이후보는 이제 'YS 차별화 전략'을 통해 구연을 청산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다.현재까지의 여론조사결과 지지도의 하향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이후보는 공식선거전에 들어가면서 이를 '여론조작'이라고 일축하며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다. 세차례 남은 대선후보 TV합동토론회와 선거전의 역동성등에 희망을 걸고 표밭을 누비고 있다.

이후보는 국회의원, 노동장관, 경기지사, 경선을 거치면서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온 같은 고향출신의 김은숙(金銀淑)여사의 든든한 내조를 받았다. 김씨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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