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결연 페테르부르크 어떤 도시인가

입력 1997-11-04 14:22:00

대구시가 이미 세계 5개 도시와 자매결연을 했지만, 이번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와의 자매결연은특히 이색적인 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다른 자매결연들이 '평범한 결연'이라면, 이번엔 '선진문화 도입'이라는 명쾌한 목표로 추진됐기 때문이다. 대구시가 이제 사회 기반시설 만들기에 허덕이던 시대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살만한 도시' '문화와 인생이 있는 도시'를 지향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

페테르부르크는 한마디로 러시아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과학이 집적된 '러시아의 상징도시'로 판단되고 있다. 1917년의 공산혁명 이후 모스크바로 옮겨가기 전까지, 통합력 없고 산만하던 시대를벗어나 처음으로 통일 강국으로 성장한 러시아가 최초부터 수도로 삼았던 도시이기 때문이다.1700년경까지도 러시아는 힘이 여러지역으로 흩어지거나, 몽골의 지배를 받거나, 내홍으로 취약한'지역'이었다. 그것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든 사람이 피터대제(재위기간 1696~1725).그는 인접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헬싱키와 거의 맞닿아 있는 네바강 지역을 뺏았고, 이 허허벌판에 새 도시를 인공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이름 '페테(피터)'를 붙여 '페테의도시(城)' 즉 '페테르부르크'로 이름 지은 것. 수천명의 러시아 귀족들을 추방 혹은 사형 등 수단으로 협박해 강제 이주시킨 뒤 수도를 이곳으로 정했다. 덕분에 인구가 1750년에 7만5천명, 1790년 20만명, 1917년 2백50만명 등으로 급증해 왔다.

수도가 이곳을 떠나 모스크바로 옮겨 간 것은 공산혁명 때문이나, 그 혁명 역시 페테르부르크를고향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1914년에는 '페테로그라드'라 바뀌었다가 1924년 '레닌그라드'라 변경됐으나, 개혁정책 덕분에1991년 옛 이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2차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의한 2년반 동안의 봉쇄 때문에 1백25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의 아픔도 갖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서북쪽으로 약 6백60㎞ 떨어져 있다. 때문에 스웨덴-핀란드-노르웨이 등과 더 인접했다. 바다(발트해)를 끼고 있어 러시아 수출입의 30%% 이상이 이 도시를 통해 이뤄짐으로써 '러시아의 서쪽 창'이라 불리고, 도시 중심의 네바강(江) 등 때문에 '북유럽의 베니스'로, 공산혁명의 터전이었다고 해서 '혁명의 요람' 등으로 불린다.

5~7월 사이에는 백야(白夜)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산업은 기계-화학-전기공학 등 중공업 중심이며, 원자로-발전터빈-선박-군수장비 등이 생산되고있다. 그외 카메라-VCR-청소기 등도 전국 수요의 20~70%%를 생산한다. 최근엔 정보통신-금융등에서 모스크바 보다 더 각광 받기 시작했다. 멕시코 보다도 더 낮은 인건비 등 때문에 외국회사가 2천5백개 이상 진출, 수출품의 47%%를 생산 중.

이같은 과학-공업-기술의 발달은 파블로프-로모노소프-멘델레예프 등 유명한 과학자들을 이 도시가 배출한 저력에 기초하고 있다. 현재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소들이 자리잡고 있다.미켈란젤로의 작품 등 세계적 작품을 보유함으로써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에르미타쥬 미술관', 노태우 대통령도 관람했던 유명한 마린스키 극장 등이 높은 수준을 대변하고 있다.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떴다는 건축 작품 '페테로프' 등이 바실리예프시키 섬과 더불어 연간 2백만명의 외국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고려인'으로 불리는 동포들이 3천6백여명 살면서 '고려사람'이라는 잡지까지 발행하고 있다. 러시아 유학생 2천명 중 5백명도 이 도시에 몰려 있다. 대우전자-LG전자-삼성전자-한라중공업 등의 지사도 설치돼 있다.

계명대학이 현지 대학들과 자매결연 했고, 소규모이긴 하지만 현지 분교까지 설치해 놓고 있다.대구시는 이번 결연으로 높은 문화수준을 도입, 대구를 '예술도시'로 끌어 올리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때문에 우선은 예술 쪽의 사표 노릇이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서로 다른경제구조를 주목, 상보적인 진출이 가능하길 바라고 있다.

〈페테르부르크(러시아)·朴鍾奉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