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주의 철학에세이

입력 1997-10-22 14:25:00

"춤살기" 내 삶의 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춤살기'쯤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문법에는 맞는지, 표현법으로는 타당한지 등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다. 어쨌든 춤을 삶처럼 추어내듯 삶을 춤처럼 살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해준다면 만족하겠다.

춤은 노동, 언어와 더불어 오랜 역사를 가진 인간의 존재양식이다. 하지만 문명화의 과정에서 노동과 언어와 더불어 오랜 역사를 가진 인간의 존재양식이다. 하지만 문명화의 과정에서 노동과언어는 세련되어갔지만 춤은 쇠퇴하고 잊혀져갔다. 이것은 야생의 삶이 길들여지고 절절하게 느끼는 체험들이 상투화되면서 축제의 신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축제의 신명을 잃어버린 삶

하지만 삶에서 누구나 한번씩은 느끼리라. 불시에 덮쳐서 우리들을 속수무책으로 흔들어놓는 저억제하기 힘든 충동, 욕망, 신명들을. 이토록 불온한 욕망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때 우리 안에 잠든 요괴가 눈을 떠서 그런가. 내 판단으로 그것은 오히려 성스러운 내면의 함성이며 아득한 시간저편에서 인류가 놓쳐버린 원초적 열정이 부활하려는 몸짓들이다. 그 반란은 먼저 표정과 몸의이완으로 조심스럽게 시작돼서 마침내 손, 발, 어깨의 격렬한 흔들림으로 이어진다.당신은 그렇게 까닭없이 경망스러워본 적은 없다고? 좋다. 지금 당장이라도 햇빛 쏟아지는 저 들판으로 가서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을 열어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득 발걸음은 리듬을 타고 팔과 손은 절로 허리에서 떨어져 어깨위로 솟고 표정은 하늘이나 땅을 향하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제 발이 대지의 부름에 답하고 손은 하늘의 축복에 감응하며 머리는 대기의 흐름에 접속되고 있다는 증거다. 저 신비롭고 성스러운 우주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당신이어떻게 춤추기를 거부할 수 있다는 거냐.

그런데 정작 나는 저 무도장에서 황홀하게 연출되는 그런 춤을 출줄 모른다. 그 흔한 블루스조차내 능력밖의 것이다. 형식과 원칙에 따른 어떤 춤도 내 체질이 아니다. 내가 출수 있는 춤이라곤오직 내몸이 신명과 열정의 리듬에 접속될 때 억누를 길 없어 터져나오는 격렬한 율동뿐이다.비록 디스코 텍이나 나이트 클럽에서는 형편없이 조롱받지만 내가 삶에서 추어대는 춤실력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고 자부한다. 가령 길을 걸어갈 때 나는 남들이 묵묵히 걸어가는 길을가끔 춤추듯 가볍게 미끄러져간다. 내딛는 발자국에서 나는 내 몸의 진동을 확인하기도 하고 그탄력을 다음에 딛는 발자국의 동력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나는 걷는다는 그 사실에 집중하며 내걸음의 보폭과 템포, 리듬등도 한번씩 바꾸어본다. 이것이 춤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5분이나10분쯤 더디게 도착한다. 그러나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라 춤을 추었던 것이니까. 먼저 도착하는 사람들이 독차지 하는 승리의 월계관도 별로 부럽지않다. 적어도 그것이 나의 온전한 목적이었던 적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내게도 그런 기회가 올때 그저 그 행운에 감사할 뿐이다.

◈생활속에서의 율동이 곧 춤

물론 춤살기의 삶은 내 독창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성경의 전도서 기록자가 준 다음과 같은 충고에 성실히 따른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가서 기쁘게 너의 빵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너의포도주를 마셔라. 너의 일생의 모든 날을 네가 사랑하는 한 여인과 함께 즐겨라. 이것은 삶속에서또 해 아래서 네가 행한 노고 가운데 있는 너의 몫이다. 네 손이 할수 있는 모든 일을 힘껏 하여라. 왜냐하면 네가 갈 무덤에는 작품도 지성도, 자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즐겨야할삶속에서 신명나게 온 몸을 흔들어 대는 춤추기에 비길만한 것이 따로 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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