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에 내린 수미산의 그림자…" 기온이 뚝 떨어진 이맘때 붉디붉은 단풍이 눈을 찌르는 여느 산과는 달리 남산은 여전히 여름의모습 그대로다. 붉은 색조로 살짝 눈화장한 여인네마냥 조금씩 단풍에 자리를 내준 산기슭과 햇빛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은빛 억새풀만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한다. 푸르른 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솔잎. 희다못해 서럽기까지한 남산의 바위에서 여름의 뒷모습을 본다.대가람 천룡사터로 오르는 길. 이제는 거의 물이 말라버린 골을 따라 고원을 향하는동안 계절의내음이 코밑에 밀려든다. 폐부 깊숙이 몰려드는 청명한 산기운에도 거친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지만 남산보다 먼저 반기는 환한 억새의 몸짓에 걸음을 멈춘다. 한낮을 은비늘처럼 보내다 낙조에 황금빛으로 색을 바꾸는 억새사이로 언뜻 삼층석탑의 옥개추녀마루가 정겨운 고원의 풍경. 적요함. 우수수 잎을 떨어뜨린채 아기주먹만한 노란 감으로 계절을 몰고온 감나무가 수리봉(고위산)그림자에 조용히 앉아 있다. 성수천장(聖壽天長)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옛 서라벌사람들의 기도소리가 웅얼웅얼 고원을 맴돌아 아련히 들리는듯하다. 왕은 어디 있으며 백성은 어디에있는가.
고위산 정상에서 서쪽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이조(伊助)벌은 벌써 황금들녘. 박달리(朴達里)를에워싼 이웃 산들이 아물아물 하계의 산들처럼 아득하다. 기린내 너머로 펼쳐진 이조벌은 다른계절에는 좀체 제모습을 볼 수 없다. 맑은 바람이 더럽혀진 대기를 쓸어가는 가을이면 순도높은황금색으로 한눈에 다가선다. 잠시 속세에 정신을 빼앗겨 수심어린 얼굴들이 둥근 미소의 마애불처럼 이내 환해진다.
금세기초 남산은 온통 바위로 뒤덮인채 나무 한그루 없이 메마른 얼굴로 흑백사진속에 남아 있었다. 우리땅의 숱한 다른 산들처럼 빼어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자그마한 산으로 남았다. 만보(萬寶)가 사라지고 없어진 역사의 땅. 그 옛날 수많은 절이 세워지고, 탑이 서고, 불상들이 새겨져도세월은 한순간 모든 것을 흩어놓고 묻어버렸다. 1천여년의 세월. 남산 어디에도 금당의 그림자를찾기 힘들다. 고작 깨진 기와편과 풍우에 삭듯 내려앉은 돌틈으로 옛 영화를 더듬어 볼뿐이다. 이제는 화려함보다 만보와 만불을 향했던 신라인들의 깊은 속내를 저린 가슴으로 돌아볼 뿐이다.그렇다해도 진하디 진한 그 역사의 향기는 바위 하나 기와편 하나에도 깊이 뿌리내려 속인들의마음속에 살아 움틀거린다.
남산의 진산 금오산(金鰲山)에 올라서면 동방 유리광(琉璃光)세계와 서방 극락정토의 빛이 마주한다. 부처의 산 수미산이 이곳이다. 솟은 태양이 찬란하게 유리광 빛을 내다 그 빛이 사라질때 금빛으로 물드는 극락세계. 범종과 목탁, 독경소리는 빛에 묻혀 억겁 회음으로 고요하게 남산을 떠돈다. 누가 노을이 내(川)에 반사돼 마애관세음보살의 얼굴에 비추니 붉게 상기된 화기가 온누리에 차고 넘쳐 금방이라도 보살이 바위밖으로 튀어나올 듯하다 고 노래했던가.
사바에 극락의 환희를 드러낸 금오산의 가을풍경은 사랑으로 세상을 제도하는 관세음의 위력일까. 장창골에서 유느리골까지 골짝마다 밀려드는 온갖 가을소리와 가을빛에 몸을 적신 사람들은이제 막 수미산에 올라서고 있다. 관세음, 관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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