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행-철도여행

입력 1997-10-08 14:02:00

"갈색추억 찾아 훌쩍 떠난다" 가을하늘이 청명하다. 지난 밤, 잠을 설친 탓인지 눈자위가 빡빡한 김복연씨(38.북구 복현동)는 사업을 하는 남편과 고등학생인 아이의 출근.등교 뒷바라지를 끝내고 글짓기지도차 나가는 대동초등학교에 잠시 들러 하루 업무를 점검한뒤 교문을 나섰다.

지난 여름 강원도 정선에서 열린 아리랑학교 에서 만나 동생연을 맺은 손성애기자(34.일본 북해도신문 서울지국 근무), 글쓰기 동료의 부인인 차순자씨(43.경산 옥산지구 신화타운)랑 셋이서 가을 바다를 담으러 떠나기로 한 날이다.

손기자는 정확하게 낮12시30분에 서울에서 내려왔다. 떠난다는 마음이 앞서 아침을 걸른 손기자를 역앞 우동집에 데려갔다. 손기자는 난데없이 지난달말 사표를 냈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한뒤 7년간 잘 다니던 직장이지않은가. 요즘 같은 불경기에,대책없이 더럭 사표부터 낸다고 모친은 걱정보따리를 풀었지만 정작 본인은 담담하다. 자신을 더잘 알고 싶고, 자신이 더 필요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언니격인 차순자씨도 제때에 맞춰왔다. 오후1시20분 동대구 출발, 오후 3시20분 포항 출발 6시 동대구 도착. 대구~포항간 대구선 동차 시각표가 무난한게 마음에 들었다.

열차표를 사들고 무조건 떠나고 보는 것이다. 지난 7월부터 새로 개통된 대구선 동차가 출발지인동대구역에 깔끔하게 대기해있다. 비교적 자주 반나절 여행을 떠나지만 그래도 늘 여행은 새로운설렘에 젖게한다. 열차에 올라타니 의외로 깔끔한 시설에 여행객들도 적어서 쾌적했다. 손기자는지난 총선때 취재차 대구를 방문하고 두번째 들르면서 언니들에게 줄 작은 선물로 송시헌의 가을이야 를 테이프에 담아왔다. 가을속으로 떠날 준비를 단단히 해왔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가을 들녘을 달리는 동차에서 만난 역무원 김태언차장(40.동구 각산동)은 교통체증에 시달리지 않고, 운전피로도 덜 수 있는 기차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진다며 오늘은 영천장날(2.7일)이라 사람이 더 많다고 전한다.

손기자는 영천장날이라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영천에서 내리자고 눈짓을 한다. 그래, 어차피 여행은 어느정도 충동적이 아닌가. 영천에서 내렸다.

꿀 담긴 샐비어가 붉은 자태를 자랑하는 영천역 구내에서 눈치를 봐가며 사진도 찍었다. 영천장은 기차역에서 불과 5분거리. 유치원 꼬마들이 기차타고 가을소풍을 간다고 역광장에 나란히 줄지어 앉아있고, 고추보따리를 머리에 인 아주머니들이 이른 장을 봐서 총총걸음으로 역으로 달려온다.

수수빗자루, 윤기오른 밤, 붉게 벌어진 석류, 새파란 녹두, 노랗게 기름 오른 미꾸라지, 영천 장터에는 온갖 가을 물건들로 풍성하다. 한바퀴 휘 둘러보고, 추어탕집에 들어갔다. 추어탕 두 그릇에,국수 한 그릇을 시키고 앉아 손기자의 육자배기를 듣는다. 정이란 주지 않아도, 저절로 가더라…나지막이 부르는 육자배기에 일순간 국수집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서울 토박이 인 손기자는 콩잎지, 명태껍질무침을 처음 먹어본다며 호호거린다.

나를 에워싼 현실로부터,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단 하루라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의 인생은 그만큼 더 풍부하다 는 차씨는 집을 떠나며 느끼는 소박한 자유, 목적지를 향하면서다가오는 작은 흥분, 낯선 곳에서 만나는 신선한 경험들,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었다가 돌아오면또다시 일상을 향한 전투(?) 태세가 갖춰진다 고 반나절 여행을 예찬한다.

역전 다방에서 진한 커피 한잔씩 마신 이들은 영천 장터의 구수함과 소박함을 한껏 즐긴채 동대구행 동차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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