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세상읽기

입력 1997-09-23 00:00:00

"'자발적 독신자'를 위한 변명"

채 1년을 못채웠던 결혼생활을 끝내고 독신을 고집해온 것도 이럭저럭 10년째로 접어든다. 인습적 강제가 아니라 삶의 양식으로 결혼을 선택하고, 심지어 다양한 형태의 동거를 연구·개발·보급(?)하고 있는 구미와 달리 경직된 도덕주의가 사방에덫을 놓고 있는 우리사회에서의 독신생활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종 '결핍'과'일탈'의 표시이며, 심지어 '불효'의 중죄일뿐 아니라 잠재적 '반사회분자'이기도 하다. 나는 어느 글에서 독신생활을 위한 체험적 수칙으로'정비''절제' 그리고 '박해에 대한 예감'을 든 적도 있지만, 이 땅에서의 독신생활은 남성에게도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공인된)가정과 (번듯한)직장은 우리 사회의 관계망을 엮어 주는 두 축이다. 가령, 마누라도 없는주제에 변변한 직장마저 없는 성인남자들은 그러므로 거의 사람구실을 못하는 셈이다. 삶의 내실이나 성취의 정도 보다는 겉보기와 이름으로 통하는 우리사회의 끈질긴 명분주의도 독신생활을어렵게 한다.

영문도 모른 체 해괴한 뜬소문으로 황당하고 구차한 변명에 내몰렸던 것도 여러번이었다. 봉건적이며 고약한 이중윤리는 유부남의 바람기에는 턱없이 관대하지만, 독신남의 일거수일투족에는 중뿔나게 민감한 투명성을 요구한다. 우리사회에 나와 같은 자발적 남성 독신자가 극히 드물다는사실은 소위 '개성의 시대'에 온갖 문화적 잡탕주의로 혼탁한 우리의 묘한 몰개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장애인이나 외국인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없다는 것은 한심하게나마 이제 성토라도 되고 있지만, 독신자를 위한 음식 문화나 주택시설을 들먹였다가는 달밤에원숭이 하품하는 소리 쯤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다소 보수적인 곳이긴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도덕성'을 이유로 원룸아파트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궐기대회가 당당히 벌어지고 있다.우리 독신문화의 전근대적 실상을 드러내는 것은 무엇보다도그 문화를 표현하는 언어의 빈곤에서두드러진다. 독신생활이 사실상 무모한 모험이고, 따라서 자발적 독신자가 희귀한 상태에서는 그생활의 활성(活性)과 창의, 자유로움과 건강함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합법적으로 계발될 수 없으며, 따라서 문화적 다양성의 한 영역과 삶의 가능성의 한 지평은 자연히 소실되고 만다. 독신을싸고도는 말들은 대개 냉소적이고 음성적이며, 그 신분의 한시성과 불안감을 노출하는 메타포(은유)들로 가득하다.

언어의 풍요는 문화적 정당성과 그 잠재력을 증거하는 것이다. 언어와 사회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철학자들의 논의는 정교하다. 일상의 근저를 뒤집어 경이(驚異)를 읽고, 상식에서 오히려 회의에 빠지는 철학의 버릇을 되새겨본다면, 이 논의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한 사회에서 생산·유통되는 언어가 그 사회의 문화적 지형과 성격을 보여준다는 사실은어떤 논의에 앞서 당연해 보인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의 역학, 그 심층과 이면, 그 장단(長短)과 공과(功過)는 바로 그 사회가 채택한 실세(實勢)언어의 성격과 구조에 반영되는 법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독신의 문화도 독신의 언어도 없다.

한 사회의 진보와 성숙을 가늠하는 지표는 다양하지만, 특히 사회적 약자나 소수계층을 대하는태도와 시각은 대체로 적실한 가늠자의 구실을 한다. 독신은 당연히 비주류(非主流)다. 그리고 모든 형태의 비주류는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한가지만 분명히 해두자. 한 사회의 성숙은 비주류와 위협에 대처하는 방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

〈한일신학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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