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세상읽기

입력 1997-09-02 00:00:00

"나쁜영화 나쁜 우리들"

장선우의 '나쁜 영화'를 보았다. 그간 관심을 가져온 감독이기도 했지만 우선 방화(邦畵)에 대한내 고약한 의무감 탓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초입에서부터 나는 잔잔한 흥분을 감출수가 없었다.화면에 빠진 내 시선을 늦추면서 드문드문 그 흥분의 연원을 캐어보았지만 당장 규모있게 정리될턱도 없었다. 다만, 나는 무슨 삼류의 신탁(神託)이라도 받은 심정으로 불현듯 '혁명'이라는 낱말을 떠올리며 극장문을 나설때까지 그 어감(語感)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이후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읽은 영화평은 영락없이 우리 정신문화의 경직되고 뿌리없는 지형도를 그리고 있었다. 장선우는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가 점점 하기 싫어진다. 한국영화판이 재미없다"고 자기모멸의 속삭임을 흘렸다. 스스로 밝혔듯이, 그가 추구해온 영화적 쟁점은 '억압을 없애고 자유를 찾는것'이며 '나쁜 영화'의 모티브는 이를 위해선 우선 우리 입장에서 우리의 현장을꼼꼼히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꼼꼼히 보아서는 안될 것, 특히 그것을 까발려서는 안되는 것이 있는 법이다. 특히 시민적 성숙과 건실한 자유주의가 확보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때로 모르는척 덮어두어야 하며, 잘못이 만연해도 '일부 몰지각한 희생양'만을 도드라지게 몰아세우면 되는것이다. 그 논리는 간명하다. "우리의 이중성을 폭로하면 이 이중성을 먹고사는 엄숙주의가 분노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이중성의 천국이다. 지식인 사회가 유달리 자정(自淨)능력이 없고 허위의식에 쉽게 노출되는 것도 같은 바탕에 이유가 있다. 가치판단의 기준만 하더라도, 한쪽에서는 종교적 도덕주의와 정치적 냉전주의의 경직된 틀이 다원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을 넘어 아직도 그 여세를 과시하는가 하면, 그 저변에는 천민자본주의적 이기심과 도덕불감증, 그리고 정치무관심의 늪이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다. 해거름을 경계로, 그리고 배꼽을 사이에 두고 이율배반적인 두 문화가 공존하고있다는 지적은 바로 이러한 풍조에 대한 자기모멸의 또 다른 속삭임이 아닐 수 없다.사실, 자기모멸의 속삭임은 비판적 양심이 이중성의 구조에 짓눌려 제음성을 낼 수 없을 때 들려오는 신음이다. 그것은 아기를 가진 자궁(子宮)이 생산을 하지 못한 채 입덧만 계속하는 모습에다름 아니다. 가령, 외설시비로 필화를 겪은 장정일이 지사적 계몽과 모더니스트의 풍자를 빠르게지나쳐서 자기모멸의 글쓰기로 빠질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떠올려보라. 물론 '나쁜영화'라는제목도 이 자기모멸의 장치인 셈이다. 장선우의 항의처럼 "각각의 영화는 나름의 노래를 부르는것인데, 구체적 현실과 시대, 대중 속을 꿰뚫기 보다 지적 허영심이나 엘리트적 우월감으로 말하는 것이 공허하고 답답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자기모멸인 것이다.

'나쁜 영화'를 "청소년의 억압구조를 고발하는 데 실패하고 눈요기용의 불량기만 가득한 작품"이라고 보는 어른들의 평가는 그들이 몸담아 살고 있는 이중성의 세계관을 여실히 증명할 뿐이다.그것은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 채 아이 눈의 티만을 꼬집어대는 찢겨진 엄숙주의에 다름 아니다. 내가 본 '나쁜 영화'는 제 사회의 그늘과 치부를 제대로 읽어주지 못하는 나쁜 우리들, 그그늘과 치부를 일부 막가는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방치하려는 나쁜 우리들, 그리고 그 구조위에서 이중성의 기득권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나쁜 우리들에 대한 자기모멸의 항의이며,혁명의 씨앗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나쁜 우리들!

〈한일신학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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