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힘들었던 시간

입력 1997-09-01 14:37:00

이제 갓 졸업을 앞둔 후배 한명이 화실문을 빠끔히 열었다. 평소와는 달리 수줍은척 소주한병을들고 들어왔다. 그 뒤로 예쁜 여자 한명이 얼굴을 붉히며 졸졸 따라들어오는데 그 두사람 모습이참 보기좋았다. 커피한잔을 내놓으며 "웬일"하고 물으니 사정상 올 가을쯤 결혼을 하게 됐다는것이다. 몇해전에도 이런 커플이 있었는데 싶어 재미반 호기심반 얘기를 들어보니 또한번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가 4학년 10월쯤 되었을까. 한창 캠퍼스엔 노란단풍이 물들어 가고 어떤 가수의 가을노래가교정에 퍼질때는 온 학생들이 휘청휘청 정신을 못차렸었다. 포장마차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철학과 녀석의 인생풀이에 매료되어 못먹는 깡소주 두병 마시고 반쯤 죽었던 일, 생활비 떨어져 허우적대다 라면 세봉지 구해놓고 다섯명이 싸우던 일 등…. 언제나 생각하면 가슴부터 저며오는 그시절, 나에게도 결혼이라는 낱말이 들려왔을땐 도무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었다. 그저 할 수있는 일이라곤 밤새도록 뒤통수 긁으며 이력서에 혼을 담아 이리저리 우체국에만 줄기차게 뛰어다녔으니까. 결혼후 방을 구하지 못해 선배의 단칸 신혼방에서 일주일이나 동침했던 일들은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시절이 가장 순수하고고귀한 시간이었으며 또한 기억속의 영원한 사랑으로 간직되고 있다.

힘없이 웃고나가는 두사람의 뒷모습에 참으로 가슴이 아려왔지만 아무 얘기도 해줄 수가 없었다.그것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그들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올지 너무 일찍 알아버렸던 내 기억이 있기에 다만 "후배님, 사랑은 고통속에서 얻는 것만이 진실된 사랑이라고 많은 선배들이 말하지 않는가. 제발 붓 꺾지말고 멋지게 한번 살아보시게"라는 말만 입가에 맴돌았다.〈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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