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어제와 오늘(6)

입력 1997-08-30 14:52:00

"한민족과의 교류"

오키나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지역 역사를 알기위해 꼭 찾아보는 곳이 수리성(首里城)이다. 이성의 정전(正殿)은 과거 유구(琉球.이하는 현지음을 살려 류큐로 표기)왕국의 국왕이 정치를 집무하던 장소였던 관계로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오키나와 공항에서 자동차로 약 40분 정도거리이고 현청이 있는 나하시의 인근에 위치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사실 이 수리성은 지난 오키나와 전쟁 당시 일본군 총사령부가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던 관계로미군의 집중포화로 폐허가 됐다가 지난 89년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오키나와 역사속에는 한국과 관련된 부분이 많이 있으며 수리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수리성이라는 명칭에서부터 일본의 역사학자중에는 조선의 '서울'에서 온 것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입구에 세워져 있는 '수례문(守禮門)'도 서울의 남대문이 숭례문(崇禮門)인 점에착안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최근 작고한 재일사학자 김달수(金達壽)씨는 수리성 정전앞에 달려 있다가 지금은 현립박물관에옮겨져 있는 '만국진량종(萬國津梁鐘)'이라는 대종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내용을 보면 더욱 확실히 한국과의 관련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저서'일본속의 조선문화'를 통해 소개한 오키나와편의 내용을 보면 원래 류큐제도는 여기저기 흩어진 성읍(城邑)국가 시대를 거쳐 1429년 쇼하시(尙巴志)에 의해 통일돼 류큐왕국이 탄생했고 1458년에는 만국진량종이 만들어졌다. 류큐왕국의 독립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명문의 내용은 이렇게 새겨져 있다.

"류큐국은 남해(南海)의 승지(勝地)에 있어 삼한(三韓)의 우수함을 모아 대명(大明)을 보차(輔車)로 하고 일역(日域)을 순치(脣齒)로 하여…"(琉球國者南海勝地而鍾三韓秀以大明爲輔車以日域爲脣齒…)

여기서 삼한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을 말하는 것이며 대명은 중국, 일역은 일본을 표현한 것이다.그래서 '삼한의 우수함을 모아'도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중심으로'라고 하는 표현으로 왕궁이름인 수리(首里)가 조선의 서울에서 왔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인 것은 아닐까라고 김달수씨는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당시의 중국을 대명(大明), 일본을 일역(日域)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국제정치 관계의 일면도 보여주고 있다. 중국과는 '턱뼈와 이틀의 관계'이며 일본과는 '입술과 이'의 관계를 유지하는방법으로 독립국가를 유지하려 했던 생존전략이 엿보인다.

14세기 후반 류큐는 명나라와 조공무역을 시작하고 또한 중계무역의 거점으로써 동아시아에서 활약하며 해양왕국의 길을 걸어왔다. 이 대종에는 당시 해외무역에서 활약한 류큐인의 기질이 표현돼 있다.

류큐라는 이름이 최초로 문헌에 등장한 것은 636년 '수서동이전(隋書東夷傳)'으로 그곳이 오키나와라는 설과 대만이라는 설이 아직도 대립되고 있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조선왕조실록 여러곳에나타난다.

그러나 교류가 그전부터 계속됐음은 수리성에서 출토되는 11세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고려기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 기와는 고대조선에서 왔다는 토기 등과 함께 현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또한 그곳 학예원이 86년 정기간행물 '한국문화'에 기고한 글에는 15세기 초기의 고려청자가수개소의 유적에서 출토됐다고 소개했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사츠마번(현재 가고시마현)의 정벌군을 보내 류큐와 종속관계를 맺는다. 그후 19세기말 조선과 류큐는 다시 한번 더 전운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일제 군국주의자들이 류큐를 먼저 차지하고 곧이어 한국을 합병한다. 2차대전후 미군점령이끝난후에도 많은 미군기지가 남아있는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류큐대학을 비롯 7개 대학에서 10여명의 한국전문가들이 한국연구를 하고 있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류큐어를 해득하는 역관을 제주에서 양성했지만 지금 우리의 오키나와연구는 미약해 보인다. 일본의 오키나와 미군기지문제 대처방법에 관심을 가지면 그들이 한반도문제에 대해 어떻게 나올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朴淳國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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