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주의 철학에세이

입력 1997-08-19 14:31:00

"이렇게 살자구요" 글이라면 그럭저럭 메워내는 편이지만 내 강의는 도무지 신통치 못하다. 이 나이에 아직도 곧잘실수로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으며 어려운 질문에는 진땀을 뻘뻘 흘린다.

신선한 충격, 노련한 관록 그 어느쪽도 내 강의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힘들어하다가 강의실을 나선다. 가끔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다 점심회식에서 이런저런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강의실로 직행하는 교수들이 있으면 나는 그들을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곤한다. 교단경력이 이럭저럭 20년 가까이 쌓여가고 있지만 나는 단 한번도 그런 순발력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월 갈수록 긴장감 더해

물론 이런 내게 아내부터 왜 맨날 그 모양이냐고 힐난이요 핀잔이다. 나로서 아주 할 말이 없는것은 아니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가르치는 철학이라는 학문에는 유창한 달변을 소피스트들의 궤변과 동일시하려는 전통이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나자신 어느덧 그런 편견에 사로잡히고만 셈이다. 그래서 나는 교육방법론을 익히고 웅변술을 연마해야할 시절에 정직하게 고민하고 숨김없이 말하는 태도를 체득하려 애썼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학생들 앞에서 어쩌다 말이 술술 풀려나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내가 지금 사기치고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강박과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성의 안개속에 잠겨있는데 막힘없이 줄줄 솟구치는 언어라니 당치 않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나는 인정한다. 이러한비난의 정서 역시 또 하나의 교활한 기만이요 위선일 수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아주낡은 발상일 수 있음을, 하지만 나는 이 구식을 고집한다. 나는 도대체 철학이 무엇인지 아직도투명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이란 나날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내가 더 크게 위안을 얻는 것은 학생들의 반응에서다. 그들 중에서 더러는 내가 흘리는진땀과 더듬는 언어들이 저 완벽하게 정리된 지식들보다 더 많은 것을 깨우쳐줄 때가 없지 않음을 확인시켜 준다.

내가 유창한 달변의 명강의 교수가 아님을 아느니만큼 나도 학생들에게 내가 살아가는 삶을 되도록 숨김없이 드러내보이려 한다. 나역시 그들처럼 엉뚱한 결과에 낙심하고 참담한 실패에는 비틀거리며 풀 수 없는 난제들 앞에서 진땀 흘리는 별수 없는 존재임을 가능한 한 솔직하게 풀어헤쳐보여준다는 말이다. 물론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많은 것을 잃기도 한다.

권위 포기 아닌 '다른 권위'필요

그래도 나는 앞으로도 내 스타일을 고집할 생각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학생들에게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대신 그들과 함께 손가락 그림을 그리겠고,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은 것들을 알게 하는대신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도록 부추길' 참이다. 물론 앎을 가르치기보다 삶을 함께하는 그런시간들이 학생들에게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경우엔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하리라. 그러나 진정한 깨우침과 성숙에 이르려면 그런 혼란, 고통을 버티어내고 견디어내야함을 깨닫게 해줄참이다.

결국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권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권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다른 권위는 가르치는 자 자신이 먼저 살아가는 법에 대해 고민하고 명증한 지식들의 여백과 틈새에서 아파하는 데서만 얻어질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학생들에게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은 교실 안에서의 명강의뿐 아니라 교실 밖에서의 실수와 방황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음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런 깨달음에 이르를 때라야 앞으로 저들이 감당해야하는 숱한 폭력들로부터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리라.

〈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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