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 선봉장은 대구사람"
의산(義山) 문석봉(文錫鳳) 의병장을 아십니까'
1895년 8월 20일 국모 민비가 시해되자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출신인 문의병장은 충남 대덕군 유성에서 '의거토적(義擧討賊·의롭게 떨쳐 일어나 왜인을 토벌한다)'을 기치로 분연히 일어섰다.을미사변 한달여만인 9월18일 문의병장이 이끄는 3백여명의 의병이 최초로 공격한 곳은 회덕(지금의 유성)관아. 삽시간에 1천여명으로 세를 불린 의병들은 문의병장이 현감을 지낸 진잠을 거쳐공주로 진격했다. 파죽지세로 진격했던 의병들은 불행하게도 일본군·관군과 맞붙은 공주전투에서 졌다. 문의병장에게 걸린 현상금은 1만금.
재기를 노린 문의병장은 그해 11월 의병 2백여명을 이끌고 현풍으로 낙향, 초개현감 현풍현감 고령현감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고령현감의 밀고로 대구감옥에 갇혔다. 남평 문씨 일가들은 '문장군을 살리자'며 감옥을 부숴 그를 구출했다.
1896년 4월 강원도 원주로 근거지를 옮긴 문의병장은 1천명의 의병을 지휘, 빛나는 전과도 올렸다. 하지만 감옥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그해 11월19일 45세를 일기로 고향에서생을 마감했다. 문의병장은 문무과에 모두 급제, 영친왕의 칙사(선생)를 맡기도 했다.문의병장은 충남대 김상기교수(43)의 사료추적 끝에 지난 94년 국가보훈처의 공인을 받았다. 김교수가 문의병장을 연구하게 된 것은 일본에 교환교수로 갔다 '을미 의병전쟁을 확산시킨 장본인'이란 문서를 발견한 뒤부터.
문의병장의 친손 극채씨(61·대구시 달서구 송현1동)나 증손 희찬씨(39·달성군 건축계장)도 "의병활동을 한 것은 알았지만 최초의 의병장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현풍면 남리에 있던 묘소는 달성공단 조성으로 구지면 창리로 옮겼다 쌍용자동차 공장 조성으로또 옮겨야 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뒤늦게 국립묘지에 안장된뒤 달성지역에는 문의병장의자취가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가문 싸움'으로 문의병장의 교과서 재등재조차 쉽지 않다고했다.
〈崔在王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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