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엔 화랑이 있었다. 나며들며 남산을 휘젓고 꽃마중하며 젊음을 가꾼 화랑들. 달음박질로, 활쏘기로, 묵상(默想)으로 하루를 보내고 넓은 가슴으로 남산을 사랑했을 신라의 화랑.남산에는 화랑들이 수련했다는 사실만 전해질뿐 남겨진 기록들이 희미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남겨진 남산과 화랑의 이야기 한토막.
화랑 효종랑이 문객들과 남산의 포석정(또는 삼화령)에서 놀고있을 때 늦게 도착한 두 문객에게슬픈 사연을 들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처녀가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다 불우한 처지를 비관해 어머니와 함께 울고있더라는 것이었다. 화랑들은 요즘 말로 불우이웃 돕기운동 을 전개, 곡식과 옷을 거둬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랑이 남긴 희미한 자취를 찾아 남산 포석정 산등성이와 해목령을 더듬어본다. 찌는듯한 무더위.허위허위 남산을 오른다. 포석정옆켠으로 난 남산순환도로를 따라 길을 오르면 매미 울음소리가온통 가득하다.
그늘 한 점 없는 길. 가끔씩 해가 구름속에 가려 더위에 막힌 숨통을 틔여준다. 한시간가량을 허우적거리며 오른 산행. 다시 길을 돌려 해목령을 향한다. 잡목과 소나무가 뒤엉킨 숲을 헤치고 나면 펼쳐지는 아담한 오솔길. 그 길을 따라 십여분을 걷다보면 해목령과 경주시내가 시야에 펼쳐진다. 게눈처럼 삐죽 고개를 내민 두 바위군. 경주시내쪽에서 이곳을 올려다보면 게눈을 흡사 닮았다. 그래서 해목령(蟹目嶺)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신라국방의 요지 남산신성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 해목령. 혈기방장한 화랑들이 무예를 닦고 호연지기를 길렀을 바위군. 천년전 이곳은 화랑도의 푸른 기상이 가득했을 법하다.어디 그뿐인가. 남산 곳곳에 놓인 미륵불. 이 미륵불들은 화랑의 현신이다.
라시대 화랑은 도솔천에서 하생(下生)한 미륵으로 여겨졌다. 또 수령 화랑을 쫓는 집단자체가 미륵을 쫓는 무리로 일컬어졌다. 화랑 김유신의 무리를 당시 사람들이 용화향도(龍華香徒)로 불렀다는 사실역시 화랑도와 미륵신앙과의 깊은 관계를 암시하는 실례들이다.
타박거리며 내려온 하산길. 오릉을 지나 남천 옆켠에 자리잡은 재매정. 진평왕시대 최고의 화랑김유신의 충정이 애틋하게 전해온다. 전쟁터에 나가기전 군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바로 옆 집에도 들르지 않은 채 우물물을 떠오게 했다는 사연이 깃든 곳. 김유신의 집으로 추정되는 이곳 재매정에는 비문과 사각형 우물이 있다. 수만대군을 호령하며 싸움터를 누빈 장군의 집치곤 초라함을 떨칠 수 없다. 오랜 세월로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 집터 대부분이 잠식돼버린 탓이다.문안에 덩그러니 놓인 유서깊은 우물. 이끼가 낀 석재가 물을 머금고있다. 집의 물맛이 옛날 그대로구나 하며 허한 가슴을 떨치고 전장터로 떠났던 김유신. 웅숭깊은 그 속내는 전쟁을 마침내 승리로 이끌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향한 동남산 기슭.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화랑교육원. 청소년에게화랑정신을 가르치는 교육장이다. 지난 70년 박정희전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건립된 화랑교육의 산실. 입구에 들어서면 박대통령 친필인 화랑의 집 화랑의 얼 휘호가 걸려있다. 매년 9천여명의청소년들이 이곳에서 화랑정신을 교육받고있다. 분단의 가슴아픈 현실에서 화랑들이 더욱 그리운것은 부질없는 허욕만은 아닐게다. 옥골선풍(玉骨仙風)의 신라 화랑들은 남산 그 어디서 천년의긴 잠을 뉘고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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