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나는 헤픈 내 눈물이 부끄러웠다. 책 읽거나 영화 보다가 우는 일은 다반사요 음악을 듣다가도 곧잘 눈시울이 뜨거워져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어느 해엔가 몇달동안 정들여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에는 체통머리없이 흐느껴 울어 초등학교 다니는 딸아이까지 심란하게 만든 적도있다. 그러나 지금 불혹을 넘긴 이 나이에 나는 더이상 내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울 수 있을 때는 그래도 아직 모든게 괜찮은 것이다. 우리의 현존을 한순간에 덮치고 뿌리에서부터 완강하게 흔들어 대는 슬픔에는 정말 모두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물고문 끝에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자식에게 그 아버지가 말한다.
"얘야, 이 아빠는 할말이 없다"눈물도 언어도 없이 오직 살과 뼈로 맞닥뜨려야하는 그 감정에서는비틀거리고 흐느적거리는 동작들조차 사치스럽게만 느껴지리라.
그런데도 이러한 슬픔들을 그저 잘못 밟은 일상의 지뢰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불행한 일에 당하여 우리가 느끼게되는 우울한 기분일뿐이며 이성적 판단을 무디게 하는 소모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에서 슬픔에 대해 갖은 경멸과 조롱의언사를 퍼부은 것은 이 때문이다. '슬픔은 어리석고 망칙한 감정이다'.하지만 많은 철학자들 가령니체나 쇼펜하워등의 견해는 다르다. 슬픔은 '으뜸의 정서'로 다른 모든 감정들은 여기서 파생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우리마음은 무색이 아니며 이미 슬픔의 빛깔로 칠해져있다. 기쁨이나 즐거움, 호기심이나 분노등은 그 위에 덧칠해지는 또다른 색깔들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이들에 따르면 글씨나 그림은 백지에서 시작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슬픔에서 시작한다.윌리엄 포크너도 이런 믿음으로 소설을 썼다. 그의 소설 '야생 종려'가 제시하는 선택항은 '슬픔이냐 기쁨이냐'가 아니라 '슬픔이냐 없음이냐'다. 집에서 분만하던 아내가 심한 출혈로 태아와 함께 숨을 거둔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은 것도 서러운 터에 어처구니없게도 처자식 살인죄로 투옥되지만 그는 끝내 미망처럼 끓어오르는 자살의 유혹을 물리친다. 추억으로나마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나마저 이 세상에 없다면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기업조차 사라지고 말겠지. 그래 '없음'보다 차리리 '슬픔'을 택하자" 우리 모두도 결국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조건이란, 슬픔으로 살아남기를 선택할 것이냐, 무의 완전한 망각 속으로 사라질 것이냐의 선택 앞에서 시시각각 내몰리는 벼랑같은 게 아니던가.
슬픔이 정녕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라면 불혹의 나이로 흘리는 눈물따위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슬픔'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자락 바람같은 추억으로 남더라도 '없음'을 택할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 슬픔과 속깊은 마음으로 화해하자. 온갖 탐욕으로 얼룩진 우리의 영혼을 말갛게 씻기 위해서라도 슬픔의 바닥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자.
〈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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