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7월25일 대동금융주식회사는 설립추진본부를 대구시 중구 대봉동 수도산 근처로 옮겼다. 이날 임시주총에서 당시 대구은행 상무이던 최상희씨를 전무로 영입하고, 감사에 장병철씨, 상무에남귀종·김재준·조성춘씨를 각각 선임했다.
9월29일 대동금융주식회사는 은행 본인가를 받음으로써 국내 열번째 시중은행으로 출범했다. 문패도 대동은행으로 바꿔 달았다.
10월31일 대동은행은 대구역 앞 대우빌딩으로 본점을 옮겼다. 당시 대동은행 본점 때문에 지역의사무실 임대료가 껑충 뛰었다는 이야기가 나돌정도로 본점의 엄청난 임대료는 화제가 됐다.11월7일 대동은행은 '새롭게 참되게 힘차게'를 행훈으로, 고래를 마스코트로 삼아 역사적인 개점식을 가졌다. 대구 본점과 서울 충무로지점의 첫날계수는 총 5천8백39억원. 당초 목표 3천억원을초과한 수치였다.
11~12월 성서지점, 포항지점, 대명동지점, 대봉동출장소, 신천동지점을 추가로 개점했다. 창립 첫해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대동은행은 1억7천9백만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90년2월24일 대구시민회관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는 1만여명의 주주가 모여 대구역 지하도까지장사진을 이뤄 화제를 낳았다. 지역민의 관심과 직원들의 노력에 힘입어 9월말 수신고 5천억원을달성하는등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운용위험이 크고 예대마진이 작은 중소기업에 총여신의 90%% 이상을 대출해야 하는 중소기업전담은행으로서의 구조적 불리함 때문에 이 해 상반기 31억원의 적자를 냈다. 일각에서는분점신축부지와 부산 부전동지점 부지매입 등 자금여력에 비해 초창기 고정자산 투자가 많지 않았느냐는 평가도 내리고있다.
10월8일에는 노동조합이 설립되면서 검사부 검사역 이경하씨가 초대위원장이 됐다. 이 해도 대동은행은 적자 위기를 맞았으나 노조가 12월 정기상여금 지급시기를 미루기로 결정해 6천7백만원의흑자로 한해를 마감할수 있었다.
91년은 영업의 다각화와 지역밀착화 산업,내부업무정비 등 영업기반구축에 전력을 기울였던 시기다. 이에따라 91년 5월10일 대동은행의 유일한 자회사인 대동리스가 설립되면서 대동은행 감사로있다 퇴임한 장병철씨가 초대 사장으로 선임됐다.
이해 9월 대동은행은 지역 처음으로 펌뱅킹서비스를 제공했고 10월말 총수신이 드디어 1조6백40억원을 돌파했다. 권태학행장은 92년2월18일 주총에서 중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동은행은국내 경기의 악화와 투서사건, 직원간 불협화음 등을 보이며 92년6월말 부실여신이 1백96억원에이르는등 어려움을 겪었다.
〈金海鎔기자〉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