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반환 카운트다운-주권반환 과정

입력 1997-06-10 14:14:00

역사는 결코 되풀이되지 않았다. 한세기가 넘는 영국의 홍콩 식민지배를 거치며 중국의 국력은무섭게 신장된 반면 해가 지지 않았던 대영제국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영국이 홍콩 식민통치를 시작한지 1백40년가량 지난 1979년부터 시작된 탐색전까지 포함, 6년을끈 홍콩 반환협상은 이같이 힘의 균형이 중국측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진행됐다.사실 협상을 먼제 제의한 쪽은 영국. 홍콩섬 및 구룡(九龍)에 뒤이어 할양받은 신계(新界)지역의조차 만기일(1997년)이 다가오자 홍콩의 경제권을 장악한 홍콩·상하이은행 등 영국계 자본들은이 조차기간을 연장토록 영국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당시 영국정부는 신계문제를 해결하고 청나라와의 3개 조약의 기존틀을 유지하면서 홍콩에 대한 영국 통치를 30~50년간 연장한다는 환상에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79년 3월 당시 홍콩총독 머레이 매클리호즈경의 중국 방문으로 시작된 영국측의 탐색전은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영국총리의 북경방문을 계기로 공식적인 협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홍콩에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행정권을 대가로 받아내려한 영국과 주권 회복문제는 협상의대상이 아니라는 중국측의 강경 입장이 맞서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돌파구를 연 것은 영국의 대처 총리가 1983년 5월 총선을 앞두고 조자양(趙紫陽) 중국총리에게보낸 서한이었다. 영국은 표면적으로는 강경한 입장을 나타냈지만, 실제적으론 협상 주도권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하고 협상교착상태에 대한 초조함을 보였다.

1997년 7월 1일 홍콩주권을 반환한다는 협상안이 1984년 9월 26일 가조인되고 이해 12월 19일 정식 서명될수 있었던데는 등소평의 독창적인 '1국가 2체제'원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은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지만 주권이 반환되는 홍콩에는 향후 50년간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생활양식을 허용한다는 원칙에 대해 대처총리는 천재적이고 실용적인 발상이라며 칭찬을 아끼지않았다.그러나 중국에 협조적이었던 영국이 중국측과 갈등을 빚게 된 것은 1989년 천안문사태가 결정적계기를 제공했다. 홍콩반환협상후 대(對) 중국 카드가 빈곤했던 영국은 천안문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중국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지자 홍콩주민의 동요를 달랜다는 명분아래 정치개혁에착수, 중국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개혁으로 오늘날 홍콩 민주화세력의 기반을 마련할수 있었다는 것이 홍콩 외교가의 공통된 분석이다.

홍콩반환을 앞둔 과도기에 빚어진 중국과 영국의 힘겨루기는 올초부터 영국의 패튼 총독과 중국이 임명한 동건화(董建華) 초대행정장관 내정자의 행정부및 입법부가 동시에 활동하고 있는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같은 갈등속에서도 양국은 △97~98년 홍콩예산안 △1천억달러의정청 재산 및 문서이관 △인민해방군 선발대의 홍콩 조기 주둔 등 굵직한 현안에 합의하는 등주권반환을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다.

〈金英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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