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책장은 닳아도 가치는 그대로

입력 1997-06-05 14:11:00

아버지가 돋보기를 꺼내 흥얼흥얼 책을 읽으면 어머니는 곁에서 사과를 깎는다. 아이가 배를 깔고 '영·희·야·놀·자'를 10번씩 꾹꾹 베껴쓰는 동안 누이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빨간 단풍잎하나를 책갈피 속에 끼워 넣는다. 종이가 귀했던 것 이상으로 책이 소중했던 시절. 이제는 이사갈때마다 한 상자씩 통째로 내다버리는 게 예사지만 모든 책은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추억의 무게로묵직하다. 누이의 단풍잎은 세월의 무게만큼 두꺼운 먼지를 얹은 채 헌책방 선반위에 누워있다.아직도 돈을 아껴 헌책을 사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 헌책방에 가면 책과 함께 여태 낡지않은 기억들까지 고를 수 있다.

대구역 굴다리 아래 '왕도서점'. 대형서점에 밀려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지만 '책 속에 있는 길'을 꿋꿋이 지켜간다는 뜻인가? 이곳 책방들은 유난히 좁고 허름하다. '서점'보다는 역시 '책방'이제격.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만큼 좁고 낮은 문이지만 억지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주인 김갑용씨외에 겨우 한 명이 더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 그냥 밖에 서서 "…있어요?" 물어보면 된다. 4평 남짓한 서점 안에 포개 놓은 책은 모두 1만여권. 척척 찾아 꺼내놓는 김씨의 손이 용하기만하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책을 꺼내려면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으로 올라가야 한다. 서너권을골라 문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훅-" 먼지를 불어낸다.

'날개' 이상 지음. 1977년. 동서문고. 2백90원.

'안중근' 1978년. 대영출판사. 각 1천2백원.

'하일라이트 물리자습서' 경북고 3-6. 2번 김경훈 천재.

책장을 펼치면 종이냄새인지 먼지 냄새인지 분간할 수 없이 피어오르는 냄새. 동시에 내 것인지남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도 함께 떠오른다.

헌책방에서 다루고 있는 책의 종류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각 성씨별 족보에서부터 아동문학전집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중고서적은 정가의 50%%를 주고 살 수 있다. 출판된 지 너무 오래 돼가격이 비현실적인 것은 별도로 책값을 책정한다. 63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가 3원20전에발행한 시조선집을 1만원에 파는 식이다. 새 책에 대해서도 정가보다 20%%정도 싼 할인가격이적용된다. 쓰던 책을 팔 경우에도 20%%의 보상가가 원칙.

헌책방에는 역시 교과서나 참고서를 찾는 중·고등학생들이 손님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몇해 전부터는 '조숙한'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이 음란서적을 구하기 위해 굴다리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고한다. 멋적게 문 앞을 오락가락하다가 "'타락한 책' 있어요?"라고 물어오는 순진한 꼬마들도 있고"삼촌 심부름 왔다"는 '기교파'도 있다. 꿀밤을 대신 얻고 돌아가기도 하지만 어린 학생들을 마다하지 않고 선정적인 외국잡지들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도 최근 많이 늘었다.'서울은 청계천, 부산은 보수동, 광주는 계림동'하고 경쟁하듯 책방이 번창했을 때 대구 시청앞도로에도 50여개가 넘는 책방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다. 남문시장으로 대구역 굴다리밑으로 번져나갔던 헌책방들. 현재는 30여개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책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서적상을 뒤져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시내에는 시청주변 신라서점, 대륙서점, 남구서점과 일신학원 앞 신흥서림 등 중고서적과 고서를 같이 취급하고있는 서점이 4곳 남아있다. 생각보다 역사적 가치가 큰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고 박물관에서나 볼수 있을 법한 문헌들을 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수성구 파동 문흥한국학자료관. 여느 헌책방과 같은 모습을 한 1층을 지나 3층으로 오르면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 2만5천여점의 자료에 압도당한다. 1903년 경무사가 의병 김도현을 잡아들이기위해 영양군수에게 보냈던 훈령, 1906년 대구은행 설립당시의 정관, 1907년 번역된 로빈손 크루소(羅貧孫漂流記). 제목만 대충 훑어봐도 한국의 근대사를 꿰뚫는 셈이다. 1925년 신명여고를 졸업한 박봉이씨의 음악장을 펼치면 당시에는 '울밑에선 봉선화'가 아닌 '정원안의 봉선화'가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국사책에서 제목만 읽었던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개벽·춘추·문장 등 개화기 시대의 문학잡지, 조병옥 이광수 유길준 김대중 이철승 등이 서명을 한 저자 증정본들. 김정원씨(71)가 개인적으로 소장한 이 자료들은 판매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귀한 자료는 절대 흩어져선안됩니다. 한데 모아 모든 사람들이 보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죠" 김씨가 소장한 자료의 귀중함이 세간에 알려진지 이미 오래. 예전에는 내로라는 학자들도 많이 찾아왔었지만 이제는 이곳을찾는 발길도 뜸해졌다고 한다.

오래된 것은 폐품 아니면 골동품이라는 편협된 시각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을 무디게 하고있다. 뭐든 많이 만들어서 자주 버리는 시대. 잃어버린 것을 찾기보다는 새 것을 사는 사람들. 컴퓨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시대지만 그속에 아무리 방대한 내용을 저장한들 책 한권의 '무게'만큼은 나가지 않을 것이다. 요즘 곁에 두고 쓰는 다리미, 고물라디오 하나에도 애착을 느끼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申靑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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