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샘터-3대가 함께사는 이길우 영남중교장댁

입력 1997-05-07 14:04:00

"고부관계 별 묘약있나요?"

"저도 직장생활하면서 92세에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평생 모시고 살았어요. 퇴근하고 돌아와서 어머님이 거실에 딱 계시면 답답한 걸 느꼈지만 저는 그걸 적극적으로 풀려고 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얘는 친정엄마에게 하듯이 여상시리 마음을 열어놓고 뭐든지 얘기하고 곰살맞게 챙기고…대단해요. 며느리를 통해서 깨닫는 게 많아요"(시어머니 허인전씨·전 적십자병원 약국장)"저는 그만큼 우리 애들에게 잘하지 못해요. 그런데 어머님은 제가 학교에서 늦더라도 애들이 어린이집 갔다가 돌아올 시간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꼭 마중나가세요. 절대로 차에서 내려 혼자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법이 없어요. 애들이 어디가도 붙임성있고 성격이 맑은게 모두 어른들과 함께 산 덕분이라고 봅니다. 너무너무 감사드려요"(며느리 김승은씨·전 성화여고 교사)요즘 3대가 함께 산다면 젊은 사람들은 무슨 비극이나 되는 것처럼 동정하고,부모세대도 희귀종처럼 여기는 풍조가 점점 강해진다. 막상 젊은 세대들은 젊은 기분대로 튀게 살지 못하고, 부모세대들은 손자손녀키우기와 살림 뒷바라지가 쉽지 않아서 편한대로 '분가'가 유행이 돼버렸다.그런 탓에 한국사회를 성장시킨 저력으로 손꼽히면서 미국에서도 연구대상으로 손꼽히는 '가족'의 의미는 날로 해체되고 있다. 가족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다소 불편하더라도 서로가 조금씩 참고 마음을 열고 위로해주는 그런 소박함에서 묻어나는 끈끈한 정이 세상살이에 흔들리는 가족 구성원에게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길우(65·영남중학교 교장) 허인전씨(62·현 한백약품 약제과장)부부, 이중원(34·경북대 병원레지던트 4년차) 김승은씨(32·현 대신대학 종교음악과 조교수)부부, 이신형(5) 현진이(3)의 보금자리는 '사람 사는 낙(樂)'이 묻어난다.

이 가족의 행복과 웃음의 비결은 시어머니 허인전씨와 며느리 김승은씨가 쌓고 있는 '신(新) 고부관계'에서 비롯된다.

"군의관 시절, 강원도에서 따로 떨어져살던 아들 내외에게 충분히 생각해보고 함께 사는게 좋을지, 따로 살기를 원하는지 결정하라고 그랬습니다. 오랜 생각끝에 내린 결정이어선지 함께 산지5~6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마찰도 없었습니다"

이웃과 친지사이에서 며느리와 사이좋기로 소문이 난 시어머니 허씨는 "자식을 잘 만난 덕일뿐고부관계에 별다른 묘약은 없다"고 잘라말한다. 스스로 '셋째딸'이라고 그러는 며느리가 어린 나이에도 지혜롭게 사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아버님이 정년퇴직하시기 전에 분가를 생각해봐라"고 허씨가 딴 살림을 거론하자 "어디로 나가라는 말씀이시냐"고 펄쩍 뛰는 며느리가 꼭 닮았다.

"어른과 함께 살면 일단 친구들이 찾아오지 않고, 예쁜 그릇도 사모으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하고,친정어른(아버지 김중철북성새마을금고이사장, 어머니 백명희 대구시의원)들이 하나뿐인 딸을 찾아오고 싶을 것인데 마음대로 출입을 못하지 않느냐"는 시어머니 허씨의 괜한 걱정에 며느리는수시로 '이대로 얹혀(?) 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며느리 김씨는 '살림도 전략이다'는 말을 실감나게 할 정도로 가장 가까운 분들을 섬세하고 꼼꼼하게 챙기기로 유명하다.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때는 물론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나 정초·어버이날이면 꼭 마음을 담은 편지부터 띄운다. 지난 93년에는 시어른 두분이 나란히 병원에 입원하신적이 있다. 이때도 며느리 김씨는 병원에 오가며 느낀 스케치와 어머님이 꼭 나으실 것이고 반드시 나으셔야 한다는 편지를 수술을 앞둔 어머님 품속에 넣어드렸다. 편지를 보며 함께 울었다."잔정을 일일이 표현하시지는 않았지만 늘 야들아 하면서 편지쓰듯이 말씀하신 친정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김씨는 남편 이씨가 강원도에서 군의관으로 있던 시절에 9백여통의 편지를 띄웠다. 온 부대원들이 매일마다 김씨의 편지를 기다렸다. 어느해 발렌타인데이에는 온 부대원들에게 카드와 초콜릿을 보내며 사기를 북돋워주기도 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로 하기 힘든 감정 표현을 쉽고 간단한 편지쓰기를 통해 전달한다. 글을 쓰면서 마음이 순화되고 아름다움이 커진다."지금도 내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쟤가 이모님으로 부르며 카드도 보내고 해요. 내 위상을 높여주는 셈이지요"

사실 젊은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어른들과 함께 살기에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특히 안방이 2개가 아니어서 한여름에도 샤워 후 목욕탕에서 옷을 다 갈아입고 나와야하며, 부부싸움도 방안에서 그칠뿐 문지방 너머까지 소리를 낸 적은 없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우선순위를 정했어요. 아무리 사회적으로성공해도 애들이 바르게 자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김씨는 때론 이상과 현실, 감정과 이성이 충돌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에 세번씩 꼭꼭전화를 걸어주는 남편과 한번씩 저녁에 맛있는 커피를 사주시는 아버님의 묵은 정에 푹 묻히고만다. 이교장선생님은 가정사에 별로 터치하지 않고 어머님에게 다 맡기면서 그냥 든든한 기둥이되어주고 있다.

"자라온 환경과 공기가 다른데 어떻게 다 맘에 들 수 있겠어요. 자식도 끈을 맺어주면 유치하다싶을 정도로 부부간에 정이 많아야된다고 봐요. 부부간에 정이 좋으면 자연히 부모에게도 잘하게되는 것 같아요"라고 하는 시어머니와, "저희가 부모님을 모시는게 아니라 얹혀 살아요. 일년에한번씩 아버님 어머님 외국으로 놀러가시면 그때는 친구들도 불러서 놀고 그래요"라는 며느리의신고부일기는 21세기 가정들이 가꾸어내야할 신 풍속도인지도 모르겠다.

〈崔美和기자〉

**편지1

신형이 할아버지, 할머니께

제게 참으로 소중한 신형이 아빠를 있게 해주신

두분의 결혼기념일을 무엇보다도 축하드리며 감사드립니다

요즘같은 세상에서 우리 어머님, 아버님만큼

자식들에게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어른들이 결코 흔치는 않겠지요. 자녀들이 그저

조금이라도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더 가지기 위해

이만큼 애달아하는 건

바로 35년간의 두분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모시고 사는 게 아니라

얹혀 살다보니 뭐라 말씀드릴 것도 없지만

부디 저희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라 생각해주시고

신형이 아빠 수련의 과정, 대학원 과정이 끝나

진짜 사회인이 되면 그땐 저희가 잘 모실게요

신형이가 아픈동안 애 많이 쓰셨고

마음 한없이 주신것 감사드립니다

이틀이라도 두분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94년 5월21일

며느리-신형이 母 썼습니다

**편지2

어머님께

현진이 돌을 맞기까지

쏟아주신 사랑과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게 참으로 동반자가 되어주는

신형아빠를 생일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늘,

기도하며

더욱 사랑하며 신뢰하며 사는

부부가 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96년12월7일

성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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