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죽을 먹어도 함께 살자

입력 1997-04-16 00:00:00

"권정생(아동문학가)"

보리 한톨 거두지 못했던 그해, 이곳 안동지방에서만도 굶어죽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먹을 것이있었던 집도 도무지 먹을 기회가 없었다. 밤낮으로 거지가 몰려드니 밥을 지을 수도 지은 밥도마음놓고 앉아 먹을 수도 없었다.

*** 보리흉년이야기 섬뜩

어떻게 한밤중에라도 밥을 지어 문을 닫아 잠그어놓고 숨어서 먹고 있으면 어느새 느닷없이 나타난 거지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 밥그릇째 빼앗아 달아났다.

돌아가신 박실어르신네가 들려준 보리흉년 때의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무서웠다."…그해 뒷산 애총(애기무덤)엔 발디딜 틈도 없이 애기들이 죽어갔제"

아랫마을 진수네 할머니가 들려준 또 다른 기근이 든 해의 이야기는 더 끔찍했다. 진수네 할머니가 열여섯살에 시집와서 이듬해쯤이니 지금부터 70년전이다.

이곳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톨게이트로 이어지는 진입로 중간쯤 수재개골이란 골짜기 건너편 널찍한 봇도랑 건너 구릉지 밭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이어서 다른 어느 밭보다 보리가 빨리 익었다. 이제 보리알이 누릇누릇 알이 들 무렵, 어디선지 수많은 거지떼가 몰려왔다. 굶주린 사람들은허겁지겁 보리이삭을 따서는 걸신들린 것처럼 비벼 먹었다.

그러나 빈속에 날보리를, 그것도 껍질째 먹은 사람들은 배를 움켜쥐고 하나 둘씩 나뒹굴었다. 누가 어떻게 손을 볼 사이도 없이 겉보리에 체한 사람들은 그냥 쓰러져 몸부림치다가 죽어버렸다.순식간에 보리밭엔 사람들의 죽은 시체가 쌓였다.

근처 마을사람들이 가서 시체를 끌어다 여기저기 산비탈에 묻었지만 대부분 시체는 그냥 그 자리에서 썩어갔다고 했다.

*** 北 6백만명 아사위기

재작년부터 북한에서 가뭄과 물난리로 동포들이 살아가기 어렵다는 소문을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맨날 들어온 그 소리가 그 소리로만 여겼다.

6·25 전쟁 이후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북한동포들의 참상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해마다 농사지은 건 당에서 다 빼앗아 가고, 한 식구끼리도 서로감시하며 감옥아닌 감옥살이를 한다고, 교과서에서, 동화책에서, 라디오의 김삿갓 북한방랑기에서,유치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웅변대회에서 "때려잡자, 김 !" 이렇게 자나깨나 들어온 소리다. 그래서 우리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어떤 소리도 북한소식은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그런데 정작, 요즘 들려오는 소식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배고픈 아이들이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기차역에서 50명이 얼어죽었고, 두만강가에다 거적에 싸서 버린 아이들의 시체가 줄을 잇고, 처녀들이 백만원에 중국사람에게 팔려가고, 사람을 죽이고불을 질러 곡식을 훔쳐가고, 심지어 사람고기까지 먹는 끔찍한 일도 일어난단다.올 여름까지 6백만에서 8백만이 굶어죽을 위기에까지 왔다고 한다. 8백만이면 북한주민의 3분의1이 죽는다는 말이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어버이 수령님의 보살핌으로 세상에서 부러움 없이 살아가는 나라라고 큰소리 치던 것이 모두 거짓말이었던가? 정말 기가 막힐 일이지 않는가….*** 한겨레 확인하며 살아야

대체 어떻게 해야만 될까?

아직도 장벽은 두껍게 막혀있고 전화도 안 통하고 편지도 못한다.

제발 당장 통일은 못하더라도 서신연락이라도 주고 받게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얼마간 휴전선한 귀퉁이라도 뚫어 굶어죽는 동포에게 밀가루라도 강냉이라도 보낼수 있게 해야 한다.우리가 가진 것으로 조금씩만 나눠 보내면 올 여름 햇강냉이가 나면 굶어죽지는 않을것 아닌가.하루 한끼씩 죽을 쑤어 먹더라도 한줌씩의 쌀을 모아 앞으로 몇개월만 함께 고생을 하자. 비록얼굴은 마주 보지 못해도 함께 나워 준 쌀과 밀가루로 우리는 한 겨레 한 동포라는 걸 확인하면서 살자. 그래서 이 땅에 다시는 한스러운 역사를 남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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