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영화 마니아-영화광들의 색다른 영화보기

입력 1997-04-10 14:00:00

"굶주린 영화광들이 모인다" 영화마니아. 통상 영화광이라 부르지만 단순한 관객의 입장을 넘어선 준(準)전문가다. '인톨러런스''전함 포템킨''국가의 탄생''장군''파업''북극의 나누크''마지막 웃음'…. 세계영화사를 빛낸 영화들을 훤히 꿴다. 미국영화뿐 아니라 '꿈''거미집의 성''진흙강'등 일본영화와 '해자왕''황토지'등중국영화의 계보까지 이어진다.

'준(準)'이란 말을 떼어도 좋을만한 사람들. 굶주린 영화광의 색다른 영화보기가 이뤄지는 곳이있다. 열린공간 Q와 씨네하우스, 새벗도서관등.

8일 오후 6시 열린공간 Q(옛 수성극장).

10여명의 마니아들이 자리잡았다. 미국 뉴욕 영화작가의 기수 아벨 페라라감독의 '나쁜 경찰'이상영되고 있다. '피아노'로 잘 알려진 하비 케이틀 연기의 진수를 맛볼수 있는 작품. 마약 폭력횡령등 나쁜 짓만 골라하던 부패경찰이 수녀강간 사건을 맡으면서 참회해 구원에 몸부림친다는줄거리다. 깡패의 총탄에 쓰러지는 마지막 장면이 레마르크의 '사랑할때와 죽을때'를 연상시키면서 가슴 찡하게 한다.

'나쁜 경찰'은 좋은 영화라기보다는 희귀영화. 마약복용과 성적묘사가 사실적이고 충격적이다. 그래서 국내개봉과 비디오출시가 어려운 영화에 속한다. 그러나 구원의 갈구가 어느 작품보다 진하게 표현돼 애잔한 감동까지 느껴진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뭔가 '컬트적'이다. 희미한 화면, 열악한 시설에, 완벽하지 못한 자막. 영화관과는 달리 혼자 오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이들을 이곳으로 이끌었을까.자칭 마니아라는 김희수씨(21)는 "제도적으로 볼수 없는 영화를 볼수 있는 파격미 때문"이라 했다. 이정희씨(25)는 "획일화, 일방화된 것이 싫어서", 같이 온 친구 황원정씨(25)는 "왜 이런 영화보면 안됩니까"라고 반문한다. 우리도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를 달라는 '외침'처럼 들린다. TV등주류매체와는 판이한 금기된 영상문화를 향수하기 위한 곳이다. '금기'라는 단어의 '반역'인 셈.금기된 영상이라면 폭력과 외설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는 기회의 이야기다. 흥행, 판권, 문화전쟁등으로 국내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물론 '노컷'이란 의미도 크다.열린공간Q는 지난 93년 문을 연 이래 희귀영화에 목마른 마니아들의 목을 축여주는 '영화 오아시스'. 영화동호인 '제7예술'을 중심으로 한 대구 시네마떼끄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영화제 컬트영화제등 한달에 한번 이상 영화제를 개최하고 두달에 한번씩 영화작가전을 갖는다.현재는 한겨레 21이 추천한 영화 1백편을 매달 10편씩 소개하는 '영화 1백편과 그들의 작품전'을열고 있다. D.W.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에서부터 임권택감독의 '서편제', 에밀 쿠스타리치감독의'언더그라운드'까지 전세계 수작영화 1백편을 체계적으로 볼수 있다.

김성익씨는 "특히 대구는 오락영화 일색인 편"이라며 "따라서 예술영화에 대한 갈증이 어느 곳보다 강하다"고 한다.

또 한 곳 씨네하우스(교육대학 옆).

열린공간 Q와 함께 시네마떼끄 마니아들을 '양분'하고 있는 곳이다. 매달 작가전과 기획전을 개최한다. 현재는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스탠리 큐브릭감독전을 열고 있다.

열린공간 Q와 씨네하우스의 영화는 대부분 서울의 시네마떼끄에서 구입한다. 복사본이라 영상과음향의 수준은 떨어지는 편. 최근에는 옛 수작영화들이 대부분 비디오로 출시돼 희귀한 맛은 덜하다. 그래서 영화제기획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7예술의 서영지씨는 "작품의 완성도와세계영화 발전에 기여한 작품보다는 일본 애니메이션등 좀 더 자극적이고 금기된 영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고 한다.

대구의 영화마니아는 약 5백명선.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창작에 대한 욕구로 영화를 분석하는 형이고 다른 하나는 감상을 위해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보는 형이다.서울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창작에 대한 갈증으로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소모임도 활발하다.그중 하나가 새벗도서관(중구 남일동). 동아쇼핑 아트홀에서 정기적으로 영화제를 개최하면서 영화반 회원중심으로 '영화보기'도 함께 시도한다.

매주 수요일 저녁 10여명이 모여 영화분석과 시나리오작법을 공부하고 영화관의 개봉영화도 감상한다. 영화반 박종화회장은 "감상수준을 넘어 제작과 함께 단편영화제의 꿈도 갖고 있다"며 영화에 대한 열의를 보인다.

또 서울소재 대학의 영화학과 출신들이 모여만든 시네포엠(783-5668)에서는 정기적으로 영화교실회원을 모집한다. 3개월과정으로 영화개론과 시나리오작법 콘티작성법 감상과 비평등을 강의한다.영화학과가 없고 영화인도 없고 촬영현장도 없는 대구. 영화의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 곳에 영화가 존재하기 위한 원초적 요소가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영화마니아.

제2의 쿠엔틴 타란티노(비디오광이었던 미국 감독)가 이곳에서 커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金重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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