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13)-바위(上)

입력 1997-03-29 14:00:00

남산에는 아담하고 고적한 전설이 서린 바위가 곳곳에 널려있다. 어느 산인들 전설이 깃들인 바위가 없는 곳이 있으랴만 단위면적당 분포수로 남산을 능가하는 산은 찾기 힘들다.서남산에는 숱한 바위들이 한데 모여 아름다운 전설을 소담거리는 골짜기가 있다. 열반골. 남산의그 많고 많은 불상과 탑들이 한군데도 자리잡지 않은 기이한 골. 하늘이 만들어 놓은 바위가 하도 기묘하기에 아예 사람들이 손 대지 못했다는 곳이다.

기린내를 마주한 용장리마을에서 법당골어귀를 거쳐 2백여m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열반골이수줍게 펼쳐진다. 어여쁜 처녀가 뭇남성들의 성가심을 피해 속세를 떠나 열반에 이르는 길을 묘사한 바위가 즐비한 골짜기. 무심한 바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전설을 탄생시킨 신라인의 지혜가번득인다.

천우사를 지나 관음사로 이르는 도로를 따라 타박타박 걸어가기를 20여m. 도로에서 개울을 건너나타나는 작은 오솔길. 꼼꼼히 주위를 살피면 십여명이 앉아 놀수있는 평평한 바위가 눈안에 들어온다. 갱의암(更衣岩). 남부러울 것 없는 대갓집 처녀가 출가를 결심하고 머리를 깎고 금빛 옷과 은으로 만든 과대(鍋帶) 요패(腰佩)를 다 벗어버린 뒤 먹물 옷으로 갈아입은 곳. 살붙이를 떨쳐버리고 떠나는 허허한 심정. 고행의 출발이다.

향기나는 머리다발을 다 끊고 잿빛 먹물 옷을 입었으나 숨길 수 없는 것은 처녀의 무르익은 살내음. 이 냄새를 맡은 뭇짐승들이 여인을 해코지하려 몰려들었다. 갱의암에서 동녘으로 5m되는 거리쯤에 있는 큰 바위. 고양이바위다. 등을 구부린 채 바위에서 기어내려오는 모습이 고양이를 흡사 닮았다. 또 위쪽에 있는 작은 곰바위. 어흥거리며 처녀를 을러댄다. 이어 개바위 여우바위 산돼지바위 뱀바위 귀신바위등 다양한 형태의 바위군(群). 허나 어느 바위인지를 분간키 힘들다. 표지판이라도 세워 이곳을 찾는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으련만.

포효를 하며 다가서는 맹수바위들. 겹겹이 다가오는 공포. 그러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서지않을 것을 다짐한 처녀의 결연한 맹세. 맹수들의 위협을 마다않고 험준한 산길을 올랐을 여인을따라 그길을 올라간다.

이내 나타나는 깎아지른 벼랑. 그 벼랑아래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 대웅전에서 동편 벼랑을 올려다보면 산밑으로 슬금슬금 기어내려오는 이무기바위. 영화쥬라기공원의 공룡모습을 닮았다. 이어 산신각 뒤편의 큰 곰바위. 땅을 짚고 선 곰이다. 그러나무서운 바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신각 앞쪽의 거북바위. 처녀를 걱정하며 물끄러미 눈을 치켜뜨고있다.

발길을 돌려 계곡안에 들어서면 고위산을 향한 산허리에 큰 바위덩어리가 있고 그위에 이상한 돌하나가 놓여있다. 마치 대변을 본 듯한 우스꽝스런 모습이다. 사람들은 이바위를 똥바위(糞岩·분암)라 부른다.

참된 진리를 깨치기위해 더러움조차 마다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해서 놓여진 똥바위. 순결한 여인조차 고행을 위해 이바위를 거쳐야했다. 이어 인근에 삐쭉 솟은 지팡이바위. 할미바위라고도 불리는 이바위에서 지팡이를 짚은 할미가 여인을 산등성이를 넘어 부처님나라 천룡사로 안내했다.안도의 한숨. 가냘픈 여인네의 깜냥으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불안과 공포, 그리고 절망. 이 산등성이에서 여인의 숱한 회한들이 모두 스러져갔을게다.

그 고행의 길을 마다않고 모진 목숨을 지탱했던 여인. 이제 불보살의 화사한 미소로 열반골을 굽어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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